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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Sez Zabelin입니다.
그리고 저는 Max Newbold입니다.
우리는 Smart History를 위한 가상의 리포터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여기 왔어요, 바로 바사르 캠퍼스에서
시스틴 성당을 재창조하는 이 곳에 말이죠.
그리고 이번에 우리는 천장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겁니다.
대신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 제단 뒤의 벽에 그린, 프레스코화에 대해 얘기해볼거에요.
천장이 생긴 지 25년 후에 말이죠
천장이 생긴 지 25년 후에요.
"최후의 심판"입니다.
"최후의 심판", 1534년부터 1541년에 제작됐죠.
그러니까, 7년이 걸린 셈이죠.
이 작품은 사실 율리우스 2세로부터 위임받은 건 아니었어요.
그렇죠, 그는 이미 죽었을 때였죠.
맞아요. 사실 두 명의 교황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었어요.
클레멘트 7세가 뒤쪽 벽에 벽화를 그리도록
계획했어요. 이 뒤쪽 벽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제단의 뒤와 위, 그러니까 교황 자신이 서게 되는
중앙 제단 뒤와 위에 직접적으로 위치했기 때문입니다.
맞아요.
그리고 추기경들에게 연설을 하는 곳이기도 했죠.
이보다 더 신성한 장소를 찾을래야 찾을수도 없을걸요.
맞아요. 바오로 3세가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 대한 위임을 맡았죠, 그렇지 않나요?
클레멘트 7세의 바로 뒤이은 교황, 맞아요.
이것은 매우, 아주 오래된 주제입니다.
아마 가장 오래된 주제들 중 하나일거에요.
이것은 최후의 심판입니다; 예수가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죠.
그의 재림의 순간 말이에요.
그리고 모든 인류를 심판하고
그들을 분류하여
죄를 지은 자들, 지옥에 갈 자들을 그의 왼편으로 놓았어요.
그리고 그의 오른편에는, 축복받은 이들, 천국으로 갈 이들이죠.
우리는 예수의 왼편과 예수의 오른편의 관점에서 이 그림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가 축복받은 이들과 저주받은 이들을 나누었으니까요.
이 주제는 아마 가장 무서운 주제 중 하나일거에요
가톨릭 전통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주제중에 말이죠.
그리고 사실, 흥미롭게도, 이 주제는 주로
성당의 출구 위쪽에 직접적으로 그려지거나 조각되었어요,
때로는 입구에 그려졌지만, 대부분의 경우 출구쪽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성당을 떠날 때,
세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바로 이것이 되게 하는 목적이었죠.
그 이유는, 당연히,
성당에 있을 때 모든 사람들은 선의로 가득 차 있지만,
현실로 돌아갈 때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좋은 공포가 필요했어요.
그리고 이 주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저질러라. 지옥에 갈 것이다" 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죠.
이것이 기본적으로 "최후의 만찬"이 갖는 메시지입니다.
당신은 방금 전에 이 그림을
역사적 맥락, 정치적 맥락에서 이해하는게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어요.
이 그림은 다시 말하지만 1534년에서 1541년에 그려졌고,
그 시기에 유럽은 혼란 속에 빠져 있었어요.
맞아요.
그리고 가톨릭 교회 자체가 그 중심부부터 위협받고 있었어요.
그렇습니다. 이 그림이 그려지기 20년 전쯤,
마르틴 루터가 그의 "95개조 반박문"을 성당 문앞에 못질했죠.
독일 북부에서요.
독일 북부라면 꽤 먼 거리였지만,
그렇지만 루터는 가톨릭 성직자였어요.
그렇죠.
그러나 그는 일종의 개혁을 주장했어요.
교회 내부에서의 개혁이죠, 맞아요.
그리고 가톨릭 교회 내의 굉장히 구체적인 관습들 중
그가 부패했다고 생각하던 것들을 지적했어요.
흥미롭게도, 그리고 어쩌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관습들은 율리우스 2세와
미켈란젤로가 초기에 위임받은 작품들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주던 것들이었죠.
맞아요. 또한 성 베드로 성당의 재건에도 도움이 되던 것들이었어요.
맞습니다. 그러나 그건 또 다른 얘기구요.
아무튼 가톨릭 교회는 정말로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전까지 묘사해온 이 시기는 전성기 르네상스였습니다.
이 시기는 인체를 수용한 시기였어요.
고전시기의 유산을 받아들이던 시기였죠.
이 시기는 바야흐로 끝이 났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공격받고 있었죠.
그리고 이 프레스코화를 궁지에 몰린 가톨릭 교회라는 맥락에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그림은 분노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포에도 가득 차 있죠. 그리고 당신 말에 동의해요.
절대적으로 위협적인 어떤 맥락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일리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 가득했던 낙관주의와
그리고 그 찬란했던 아름다움이 사라졌으니까요.
어떤 이상적인 아름다움 말이죠
미켈란젤로가 천장에도 나타냈던 그런 아름다움 말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대신해 어떤 공격성이 여기에 보여요.
중앙에 위치한 예수 그 자신을 보세요.
여기에 우리가 보고있는 예수는 축복받은 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어요.
그의 관심은 저주받은 이들에게 가 있죠.
맞아요. 그의 왼편으로요.
그의 손은 들려져 있고, 거의 내리찍는 낙인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가 십자가에 매달릴 때 손에 생긴 구멍이 보이네요.
그는 저주받은 이들을 지옥으로 보내 벌하려 하고 있어요.
그리고 마치 그의 왼손으로,
그는 그가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몸에 난 상처를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죠. "나는 고통받았어. 이제 죄인들이 고통받을 차례야."
"바로 나처럼 말이지" 하고요.
맞아요.
오히려 이 그림에서, 축복받은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성모 마리아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밑에서 웅크리고 있어, 마치 그녀는 더 이상 아무도 도울 수 없는 것만 같죠.
아무도 보호할 수 없구요.
그녀는 더 이상 인류를 위해 탄원할 수 없는 거에요.
아, 이건 매우 중요하네요.
미켈란젤로는 여전히 미켈란젤로네요.
그는 여전히 예수를 일종의 거대함으로 그리고 있어요.
그것이 그의 신성함에 대한 표현입니다.
맞아요
거의 마니에리즘 화가들 수준이에요.
그렇죠.
그리고 어떤 면에서, 마블 코믹스 같은 느낌도 들어요.
보면, 이 몸통은 거의 근육 위에 근육을 쌓은 수준이잖아요.
맞아요, 그가 앞으로 성큼 나서고 있을 때요.
예수의 양 쪽 사이드에는 성인들이 등장하고,
또한 구약성서의 중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매우 전통적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왼편과 오른편에 대해 말할때,
우리는 아래쪽에 한해 왼편과 오른편을 나눈 거였어요.
맞아요.
여기는 천국이고, 이 레벨에서는
왼쪽과 오른쪽이 사실 그런 식으로 적용되지 않죠.
맞아요. 여기 보이는 몇몇 인물들을 볼까요.
예수의 팔 아래 웅크리고 있는 성모 마리아 말고도,
예를 들면 성 로렌조가 있어요, 그는 그를 불태운 쇠막대기를 들고 있죠.
성 베드로도 보입니다. 매우 분노에 가득 차 보이네요.
성 베드로는 열쇠를 가지고 있네요
열쇠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는 예수 바로 약간 아래쪽 오른편에 있어요.
그의 왼편에, 우리는 성 바톨로뮤의 큰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중 하나죠.
맞아요. 성 바톨로뮤는 많은 초기 성인들이 그랬듯이,
정말 너무 흉측한 방식으로 순교당했죠.
그는 가죽이 벗겨졌어요. 산채로 말이죠.
그는 사실 그의 벗겨진 피부를 들고 있습니다.
그의 왼손에요.
그리고 오른손에 칼을 들고 예수를 올려다보고 있죠.
맞아요. 그는 많은 성인이 그렇듯 그의 순교에 쓰인 도구를 들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나 시각적으로 그려져있어요, 자신의 피부를 들고있는 게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늘어져있는데, 이것은 참 독특합니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가설일 뿐이지만
성 바톨로뮤의 피부에
그 피부에 있는 얼굴부분에 그려진 것이
사실은 화가 자신의 자화상이라는 설이 있어요.
전 아닐거라 생각해요. 그저 가설이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가 꽤 신빙성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건,
이것이 실제 미켈란젤로와 정말 비슷하다는 거에요.
우리는 미켈란젤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고,
그의 코가 기형적으로 꺾여 있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카락도 그렇구요.
정말 미켈란젤로가 딱 그대로 그려진 것 같다니까요.
그리고 이 독특한 아이디어에 대해 심사숙고해보게 됩니다.
미켈란젤로가 이 생명력이 없는 피부에 그 자신을 그려넣으려 한
그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요.
그리고 그를 어떤 위치에 놓으려 한 것인지에 대해서요.
그 얘기는 나중에 더 하도록 하죠.
좋아요.
"최후의 만찬"에 나타난 형상들에 대해 잠깐 얘기해볼까요.
좀 전에 우리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사라진 것에 대해
이야기했었죠. 여기서 미켈란젤로는,
제 생각엔, 아름다움이 신성함과 연결되어 있다는
그리고 신성함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난 것 같아요.
대신, 때로는 매우 흉한 사람의 모습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흉할 뿐 아니라, 그들의 팔 다리 모양은 더이상 우아하지 않아요.
팔이 양손으로 허리를 짚고 있죠. 이것은 이 그림을 매우 역동적으로 보이게 해요.
되려 너무 자주 나타나, 거의 폭력수준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혹은 어떤 대혼돈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인물들이 서로 연계되거나 그들의 팔 다리가 움직이는 모습이 나타난 방식이 말이죠.
그리고 그들의 몸은 어딘가 뒤틀린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머리는 너무나 조그맣죠.
그들은 그 전의 사랑스러운, 조화로운 신체 비율을 갖고 있지 않아요.
천장에 나타난 것과는 아주 다르죠.
그리고 마치, 저에게는
미켈란젤로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아요. " 이것은 인간에 대한 찬미가 아니다.
이것은 예술 작품이다"
"혹은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작품이다"
신과의 관계.
신과의 관계, 맞습니다.
이것은 메시지가 일차적인 목적을 갖는 작품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위해 그는 그가 해야할 바를 한 겁니다.
인물들에, 그리고 구성에. 그 메시지를 확실히 나타내기 위해서요.
"죄를 지어라, 그러면 너는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다.
성당을 떠나라, 성당을 배신해라
그러면 너는 영원히 지옥불에 고통받을 것이다"
정말 그로테스크하네요...
이것은 매우 특별한 근대적인 아이디어입니다.
이후로 화가들이 이렇게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
신체를 왜곡하는 것에 대해 익숙해지기까지는
몇 백년의 시간이 더 걸렸어요.
맞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매우 근대적인 아이디어이죠.
네. 그리고 저는 그것이 성 카타리나의 모습에서 완벽하게 나타났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바퀴를 들고, 앞으로 몸을 숙이고 있죠.
그녀의 머리는 지나치게 작고, 팔은 매우 그로테스크해요.
그녀의 신체 위치는 매우 어색해요.
그녀에게 아름다움이나 우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은 다른 많은 인물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요.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성인들의 형상에 대해서
제가 또 말하고 싶은 한 가지는
미켈란젤로가 그가 이 형상들을 그리고 있을 때, 말하기를
이 성인들이 믿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이들,
성 로렌조, 성 세바스티안처럼 화살에 꿰뚫려 죽었거나,
성 카타리나처럼 바퀴에 밟혀 죽었거나,
이렇게 오로지 예수에 대한 믿음을 위해
그들의 생명을 바치고 고난에 처했던 이들을 보여주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고,
어떤 것을 겪어도, 어떤 시험에 들지라도
예수에 대한 믿음은
굴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라는 것이죠.
굴하지 않고, 그 믿음을 죽음과 고난 앞에서도 지켜낸다는 것이죠.
어떤 이들은 그것이 미켈란젤로가 스스로
그의 말년에 그 자신에게 묻기 시작한 질문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또한 그 당대가 가지고 있었던 의문이기도 했죠.
맞아요. 그 시대의 가톨릭 교회를 둘러싼
전쟁과, 고난, 폭력을 보고도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해서요.
맞아요.
좀 더 밑에 나타난 인물들에 대해서도
한번 살펴보기로 하죠.
그리고 최후의 만찬 그 자체의 내러티브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요.
어떤 면에서, 우리는 예수 바로 밑에 나타난
인물들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네요.
천사들 말이죠?
목청껏 황금 나팔을 불고 있는 천사들이요.
거의 보면, 볼이 터질것처럼 볼록해진 것이
죽은 자들을 무덤에서부터 깨우는 것처럼 보여요.
맞아요. 그리고 이 천사들로부터 좀 더 아래쪽 왼편으로 내려가면
우리는 미켈란젤로의 오른편....
이 아니라 예수의 오른편이죠.
맞네요. 예수의 오른편에, 저 초록색 언덕에,
우리는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있는 걸 볼수 있어요.
이 퀴퀴한 영혼들, 이 해골들이
죽은 자들 사이에서 떠오르고 있는 것을 말이죠.
이것은 매우 훌륭해요, 거의 말 그대로 가장 적합한 해석이죠.
그리고 그들이 떠오를때, 천사들은 아래로 다가갑니다.
이 날개 없고, 거의 남성으로 보이는 천사들은
다가가서 날아오르는 그들을 잡아주죠.
묵주를 이용해서 끌어올려지고 있는 사람들을 좀 보세요.
그리고 그들을 천국으로 끌어당겨주고 있죠.
미켈란젤로가 말한 것처럼,
기도를 통해, 기도의 힘을 통해 천국에 갈 수 있는거죠.
그러나 역시 미켈란젤로죠, 그림은 너무나 생생하고 육체적이에요.
그리고 마치 천사가
어마어마하게 육체적으로 강력해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중력을 이겨내고 그들을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말이죠.
여기에선 어떤 압박과 노력이 느껴져요.
그리고 다른 쪽을 보면,
우리에겐 오른쪽이고 예수에겐 왼쪽인 쪽이요,
저주받아 지옥에 가는 자들이 나타나있죠.
천사들이 그들을 끌어올려주는 대신,
이곳의 천사들은 주먹을 쓰고 있어요.
그들을 때려눕혀 아래로 보내고 있어요!
내려치고 있죠.
그리고 이들은 기어올라오려고 하지만
천사들이 그들을 끌어내리고 있어요.
밑의 악마들조차 그들에게 기어올라와
그들을 지옥으로 끌어내리고 있네요.
정말 훌륭합니다. 그렇죠?
당기고 밀고 하고 있네요.
그러나 여기서 가장 기억에 남는 형상은
바로 이 저주받은 남자입니다.
방금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깨달은 것 같네요.
인간의 고뇌, 그 얼굴에 나타난 비애의 감각이
정말 뛰어나죠. 여기 나타난 것은
슬픔과 공포만이 아니라, 그 스스로의 결함에 대한 인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느끼기엔, 이런 식의 인간 상태에 대한 상징이
우리가 얼마나 선하려고 노력하건 간에,
우리의 의도가 얼마나 선했건간에,
우리가 얼마나 옳은 것을 분간할 수 있건간에,
우리는 옳지 않은 일을 저지른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에, 이러한 예수의 재림의 날에
우리는 이미 심판되었고 결정은 이미 내려졌죠.
그리고 그의 표정은 이러한 모든 진실을 깨닫는 순간에 대해
너무나 아름답게 그 결정체로써 묘사되어 있어요.
맞아요.
만약에 누군가 지옥에 가게 된다면, 물론
바로 지옥에 가는건 아닙니다. 배를 타고 가게 되죠.
고전적 신화같은 거죠.
맞아요. 이러한 신화는 계속해서 반복되고, 단테의 "신곡-지옥편"에서 영구적 개념으로 자리잡았죠.
나루지기인 카론이 있네요.
그는 지옥의 강가에서 영혼들을 때려서 그의 배에서 떼어내고 있어요.
왜냐하면, 당연히 그들은 가기를 매우매우 꺼려할테니까요.
게다가 악마들이 쇠스랑으로 그들을 수확하여 아래로 데려가고 있네요.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가장 아래쪽 오른편인가요?
맞아요. 이 그림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요소는
바닥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입니다. 미노스가 보이네요.
그의 몸을 거대한 뱀이 허리께에서 휘감고 있어요.
바자리는 이 작은 소품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죠.
바자리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교황이 그가 작업중일 때 방문객을 데려오지 않기를 매우 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교황은 비아지오 다 시에나라는 사람을 데려왔어요,
매우 고귀한 사람으로,
바자리는 그를 예법의 달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거의 완성된 그림을 보러 온거죠.
교황이 비아지오에게 "어떻게 생각하시오?" 하고 묻자
그는 매우 직접적으로, 화가 앞에서
이것은 교황의 예배당에는 절대로 부적절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너무 누드가 많다구요.
이것은 술집에나 적합하지, 바티칸에는 적합하지 않다구요.
미켈란젤로는 그게 맘에 들지 않았죠.
그래서 복수를 한겁니다.
비아지오가 교황과 자리를 뜨자마자,
미켈란젤로는 기억을 더듬어 그의 얼굴을 그렸죠
(ㅋㅋ) 오른쪽 하단의 타락한 인물의 얼굴 부분에 말이죠.
게다가 뱀한테 먹히고 있는 인물이요.
복수를 제대로 했네요!
정말 그래요.
미켈란젤로는 종종 이런 복수를 했답니다.
그랬죠. 이제 미켈란젤로가 그의 자화상을 그리기로 한 곳으로 돌아가볼까요?
저는 그게 정말 흥미롭거든요.
그는 예수의 바로 오른쪽에 있어요.
거의 예수와 같은 높이에요.
즉, 그는 성인들과 또 다른 중요한 인물들과 함께 있죠.
하지만 그는 아래쪽 왼편 사이드 위로요.
어딘지 위험하게 둥둥 떠 있습니다.
그냥 위험하게 둥둥 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성 바톨로뮤 자신이
그 피부에 별로 신경을 안 쓰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리고 뭔가 좀 아무 생각 없이 들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요, 마치 곧-
떨어뜨릴 것처럼요.
놔버릴 것처럼요. 그리고 그가 놔버리면,
저 피부는 바로 카론의 보트 위로 떨어질거에요.
그리고 지옥으로 옮겨지겠죠.
맞아요. 그리고 저에겐 그가 마치 약간 중간에 끼어 있는것처럼,
저 피부가 예수의 구원의 힘과
저주받은 자, 우리가 아까 살펴보았던
방금 지옥에 간다는 것을 깨달은 인물
이 둘 사이에 끼어있는 것처럼 보여요.
이것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불확정성,
우리가 이 시기의 그의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그의 영혼의 운명에 대한 불확정성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가 죽으면 어디로 갈 지에 대해서-
이 때 그는 매우 늙은 상태였고,
물론 그 이후에도 더 오래 살았지만
그가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인지, 아니면 지옥에 갈 것인지에 대해서요.
그리고 분명히 미켈란젤로의 큰 공포는
그가 지옥에 갈 지 모른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제 생각엔 이 때에조차
그가 25년 전에 그렸던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이 초기의 작품,
인류와 인간의 신체를 찬미했던 작품들이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강하게 따르지 않았던 작품들이
어쩌면-
그를 저주받게 했을지도 모른다고,
혹은 그러한 심판의 날에 별 도움이 안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리고 그러한 주장을 더 뒷받침해주는 사실은
미켈란젤로가 그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선택한 것이
텅 빈 껍질, 피부 위에 그렸다는 사실이에요.
영혼의 개념으로 얘기한다면
미켈란젤로의 영혼이 갈 곳에 대해 말한다면,
이 피부에는 영혼이 갈 곳이 없잖아요.
그렇죠.
어떤 면에서, 이것은 일종의 자기고발일지도 모릅니다.
방금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 스스로가 일생을 허구를 창조하는데 보낸 것에 대해서 말이에요.
그렇죠.
말하자면 그가 일생을
어떤 면에서, 가장 바깥쪽에 있는 피부를
창조하고 찬미하였지만
그 본질은 없었다 라는 것이겠죠.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내면도, 영혼도, 실체도 볼 수 없어요.
그가 한 것이 정말 그런 것일까요?
그가 돌을 조각하여 생명력을 불어넣은 걸 볼 때
그것이 정말 현실일까요?
신이 현실을 창조한 것은 그렇지 않죠. 하지만....
그렇지만 거기엔 어떠한 자부심이 있어요.
거짓이고, 잘못된 자부심이지만. 분명히 있어요.
창조자로서의 미켈란젤로에 대한 자부심이요.
그의 별명은 "Il Divino", 즉 "성스러운 이"였어요.
그래서, 그의 그 이후의 삶에서 미켈란젤로는
말하자면, 그의 허풍을 후회하기 시작했을까요?
그의 창조에 대한 그의 자부심을
후회했을까요?
그것은 가톨릭 교회가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한 바로 그 질문과도 같았어요.
종교개혁은 정말 어마어마한 의문을 초래했죠.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한 인간의 소우주를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제 생각에 그 질문들은
가톨릭 교회 전체가 해결하려고 하기 시작한 질문이었어요.
맞아요.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톨릭을 믿는 것이 천국에 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가?
가톨릭 예식이,
그들이 말하는 것을 진짜 행하고 있는 것인가?
교황과 가톨릭 예식이 필수적인 것인가?
아니면 어떤 면에서 장애물일 수도 있을까?
맞아요. 어쩌면 천국에 가는 것은 신과의 좀 더 개인적인 관계와 관련된 것일까?
혹은 기도와 관련된 것일까?
이 모든 질문들이 절대적으로 이 그림에 정보를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더 나아가 이 그림을 종교개혁의 표현으로 만들었고
이러한 종교적 의문과 혼돈 속에서 발전한
반종교개혁에 대한 표현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러한 모든 혼돈에 대한 작품이에요.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