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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과학과 인간의 가치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도덕성에 대한 질문,
선과 악, 또 옳고 그름에 관한 질문들에는
과학이 답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과학은 우리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을
얻게 해 주지만
우리가 어떤것을 가치있게 여겨야 하는지 절대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사람들, 제 생각엔
이 자리에 계신 대부분의 분들은, 과학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절대 해답을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이 가치있는 삶을 살도록 하는것인가 ?"
"무엇이 죽음을 가치있게 하는가?"
"훌륭한 인생을 구성하는것은 무엇인가?"
저는 이것이 오해라고 주장하려고 합니다.
과학과 인간 가치의 분리는
오해이며 또 실제로 인간 역사의 이 시점에서
그러한 오해가 상당히
위험한 것임을 주장하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과학은
도덕과 인간의 가치에 대한 기반을 제시할 수 없다고 합니다.
왜나하면 과학은 사실에 대한 학문이고,
사실과 가치는 다른 영역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종종 이렇게도 생각하지요.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기준이 될만한
모범 답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생각들이 확실히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가치들은 일종의 사실입니다.
의식을 가진 개체의 행복에 관한 사실들이죠.
왜 우리가 돌에 대해 도덕적 의무를 느끼지 않을까요?
왜 우리는 바위에 대해 연민을 느끼지 않는걸까요?
그건 우리 생각엔 바위가 고통을 느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죠.
또 우리가 만약 곤충들보다
우리와 같은 영장류에 대해 더 걱정한다면 (당연히 그렇죠)
그건 우리가 그들이 잠재적인 행복과 고통에
보다 더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이것이 사실적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생물학적인 복잡성과 경험의 가능성 사이의 관계를
잘못 해석해 왔다면
우리가 그 곤충들의 삶에 대해 틀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또한, 인간의 가치에 대한
개념들 중에서
의식적인 경험과 그에 따른 변화들에 대한 염려로
환원 시키기 불가능한
인간의 도덕성과 가치에 대한 개념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종교에서 얻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 당신이 선과 악이 궁극적으로
신과 함께하는 영원한 행복으로 이어지든
지옥에서의 영원한 고통으로 이어지든지 간에
사후의 조건들과 연관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의식과 그 변화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 같은 변화들이 사후에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그 자체가 사실적 주장입니다.
물론, 사실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이 생에서 인간을 위한
행복의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우리는 그 같은 사실들의 연속체가 있다는 걸 압니다.
우리는 실패라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잘못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잘못되는 그런 상황 말이지요.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밥을 주지 못하거나,
타인들끼리 평화로운 협력적 토대를 찾을 수 없다거나,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되는 상황들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런 연속 선상에서,이상적인 상태로,
말하자면 이런 컨퍼런스 자체를 기획하는 것 자체가 가능한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게 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알고 있습니다.
이 연속 선상에서 움직이는 방식에는
옳고 그른 답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에 콜레라균을 넣는 게 좋은 아이디어 일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악마의 눈을 믿는 게 좋은 생각일까요?
그래서 나쁜 일들이 생기면
곧바로 이웃을 비난 할 수 있도록이요? 아니겠죠.
인간 공동체가 어떻게 번성하는지에 대해
알려져야하는 진실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들을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간에 말이죠.
또 도덕성은 이러한 진실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치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사실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상황은
게놈의 단계에서 부터
경제체제, 정치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인간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인간 두뇌에 관해 이야기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계와 그 속에 존재하는 우리 자신들에 대한 경험은
사후에 무슨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두뇌안에서 실제화 되기 때문입니다.
자살 폭탄 테러범이 사후에 72명의 동정녀를 얻는다해도,
이 생에서, 그의 성격은--
그의 다소 불행한 성격은--
그의 두뇌의 생산물입니다.
그래서--문화를 형성하는 것들 --
만약 문화가 우리를 변화시킨다면, 실제로 정말 그러는 것과 같이,
이는 우리의 두뇌를 바꿈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어떤 문화의 다양성이 있던 간에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뇌과학, 심리학과 같은 뇌에 대한 학문을 통해
어떻게 인간이 성공하고 전성기를 맞을 수 있는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장하는 바는
가치라는 것은 사실,
의식적 경험과 의식적 존재에 대한 사실로
환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의식적 주체가 겪을 수 있는
변화에 대한 공간을 영상화시킬 수 있습니다.
또 저는 이것을 도덕에 대한 전망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식적인 생명체의 행복과 안녕에 상응하는
꼭대기와 계곡을 가진 지형도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는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인 것이지요.
또 한가지 주목할 것은
거기에는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상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가 더 공부해봐야 하는 것이지요.
아마 그런 상태들은 신비로운 것이라 거나
영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가 있을것입니다.
우리 뇌와 마음의 특별한 구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은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있을테지요.
제가 주장하고 있지 않은 것을 확실히 하기로 합시다.
저는 과학이 이 공간을 지도로 확실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상상이 가능한 모든 도덕적인 질문에
대답을 하게 될 것이라는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언젠가 여러분이 두번째 아이를 낳아야하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
슈퍼 컴퓨터에게 조언을 구할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란의 핵무기 설비기관을 폭격해야만 하는지 아닌지,
혹은 여러분이 TED에 든 돈을 사업상의 지출로 공제받을 수 있는지 알려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웃음)
하지만 만약 질문들이 인간 복지에 영향을 준다면
그러면 그것들에는 대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찾을 수 있든지 없든지 간에 말이지요.
그래서 이것을 받아들이는것--
인간이 어떻게 번영하는지에 관한 질문들에
옳고 그른 대답들이 있다는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도덕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법을 변화시킬 것이고,
미래의 인간 협동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변화시킬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는 교내 체벌이 합법인
주가 21개 있습니다.
교사가 어린이를 나무 막대기로 때리고, 세게 말이죠,
커다란 멍과 물집이 생기게 하거나 심지어 살갗까지 찢어지게 하는 것이 합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마다 수백 수천의 어린이들이,
이런 폭력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여기 불이 들어온 지역을 보고, 여러분들은 놀라지 않으실 겁니다.
코네티컷(Connecticut)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이 행위들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명백하게 종교적입니다.
만물의 창조주가 직접 말하기를
아이를 제대로 키우려면
매를 아끼지 말라고 했죠.
이것은 잠언 13 장, 20장, 또 23장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질문을 하나 던질 수 있습니다 :
일반적으로 말해서,
아이들의 건강한 정신적 발달과 행동을 이끌기 위해
그들을 고통과 폭력,
모욕에 노출 시키는 것이
좋은 생각일까요?
(웃음)
이 질문에 답이 없다거나,
이 질문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저는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이
아마 행복과 안녕은 정의를 내리기 어렵고
시대가 변하면서 계속해서 새롭게 정의될 것이라 생각하실 거라 예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복지에 대해
객관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육체적 건강에 대한 비유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상태의 기준은 불명확합니다.
우리가 마이클 스펙터 (Michael Specter) 에게서 들은것처럼, 그것은 과거 수년사이에 변해 왔습니다.
이 동상이 조각되었을 때
평균 예상 수명은 30살 정도였을 겁니다.
요즘 선진국에서는 약 80세 이죠.
어쩌면 언젠가는 게놈을 조작하는 게 가능해서,
200살에 마라톤을 뛸 수 없는 상태가 굉장히 큰 장애로 간주되고
당신이 그런 상태에 있다면
사람들이 당신에게 기부금을 보내주는 그런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웃음)
여기서 주목할 것은, 건강에 대한 개념이
확실히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해서
건강에 대한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 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의 구별은
우리가 과학에서 다루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분명합니다.
주목해야할 다른 한가지는 이 도덕의 지형도에는 많은 봉우리가 있을거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번영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봉우리들이 여럿 있을 것이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사회의 구성 방법에
대한 것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왜 이것이
객관적 도덕의 관념을 약화시키지 않을까요?
음식을 예를 들어봅시다.
저는 단 한가지의 적당한 음식이 어딘가 분명히 있을거라고
여러분께 논쟁을 펴는 시도는 절대로 하지 않으렵니다.
건강한 음식을 구성하는 재료에 대한 범위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음식과 독약사이에도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무엇이 음식인가?" 라는 질문에
수많은 대답들이 있다고 해서
인간의 영양에 대한 사실은
다 허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보편적인 도덕이란
여기에는 예외란 있을 수 없다는 전제가 있어야 할 것이라 여기기 때문에
이에 대해 걱정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만약 거짓말하는것이 그릇된 것이라면,
거짓말하는것은 반드시 항상 그릇된 것이어야 하고,
만약 여러분이 그 예외를 찾는다면,
도덕적인 진실과 같은것은 존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체스로 비유를 들어봅시다.
만약 여러분이 이기는 체스를 하려한다면,
"퀸을 잃지마시오," 와 같은
원칙은 지키는 것이 좋겠지요.
하지만 거기에는 예외가 분명히 있습니다.
여러분의 퀸을 잃는것이 기막히게 좋은 선택을 하는 것인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단 한가지 좋은 선택일 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스는 완벽한 객관성의 영역에 있습니다.
여기에 예외가 존재한다고 해서
객관성 자체에 변화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 도덕적인 영역에서의
문제들을 이야기해 봅시다.
여자의 몸에 대한 크나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사진은 그 중 한 예입니다.
다 덮어 버리면 되는 거죠.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지적 사회의 자세는 이러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보스턴(Boston)이나 팰러알토(Palo Alto)에서는
이런 것을 ‘잘못된 것’으로 여길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오래된 문화 속에서
자랑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아내와 딸들을 옷 가방 속에 살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리고 이렇게 옷 가방 속에서
숨이 막히는 이'특혜’을 거부하는 여인들을
쇠사슬로 때리거나 그들의 얼굴에 황산을 뿌리는 것은
나쁜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는 이는 누구인가요?
누가 인간의 행복과 안녕에 대해
조금 밖에 알지 못하기에,
이런 관습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바라봐서는 안된다고 하나요?
저는 자발적으로 착용하는 베일에 관해 이야기하는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입을 수 있어야하지요.
하지만 자발적이라는 것이
이런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여자 아이가 강간을 당했을 때,
이 딸의 아버지는 수치심에 사로잡혀서
이 딸을 죽여야 할까 고민하는 경우가 흔한 사회 말입니다.
잠시만 이 사실을 당신의 머리 속에서 되새겨 보십시오:
당신이 딸이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것은 그 딸을 죽이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번영에 상응하는
꼭대기가 있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사회가 완벽한 해결 대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 사진은 대부분의 서구화된 사회의
잡지 판매대에서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많은 남성들 중에서
여기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발견하기 위해서는 철학 학위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웃음)
하지만 만약 우리가 사색적인 분위기에 있다면
우리는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여성의 몸의
젋음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최상의 방법인가요?
이 것이 우리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인가요?
아니겠죠. 그렇다면 아마도
이 두 가지의
극단적 예 사이에는
좀더 균형 잡인 지점이 있을 것입니다.
(박수)
아마 거기에는 여러 지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도덕적 지형도에는, 인간 문화의 다른 변화를 고려하자면
여러 정상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정상에 있지 않는 방법이 더 많을 것이라는 거지요.
모순적이게도,
도덕과 윤리에는 옳고 그른 대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저 의견에
동의 하는 사람들은
여러 종교의 지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도덕적 질문의 옳은 답을
인간과 동물의 건강에 대한
개인적인 지적 분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을 통해서 받지요.
사실, 도덕적 창으로서의 종교는,
대부분의 도덕적 논쟁에서
인간과 동물의 고통에 대한 참된 질문들을
배제시키고는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인종 청소나 핵무기의 확산,
빈곤 등 보다 중대한 문제들 보다
동성 결혼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 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 종교 지도자들에게 한가지 옳은것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인간 가치들에 보편적인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길을 막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한가지 주목해야할 것은
우리는 도덕과 윤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다르게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세속적, 학문적, 과학적인 방면에서 그렇지요.
우리가 도덕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우리는 다른 세계의 의견의 차이에 가치를 둡니다.
예를 들어 달라이 라마 (Dalai Lama) 가 매일 아침 일어나서
동정심에 대해 명상을 잠기고,
그는 다른 인간을 돕는것이 인간의 행복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테드 번디 (Ted Bundy) 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테드 번디는 젊은 여자들을 유괴하고 강간하고
고문하는것과 죽이는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시간을 생산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의견의 차이가 있는것처럼 보입니다.
(웃음)
대부분의 서구 지성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바라보며
"글쎄, 과학의 영역 안에서만 보자면 달라이 라마가
정말로 옳다고 할만한 점은--정말로 옳다고 할만한 점은--
또 테드 번디가 진짜 잘못됐다고 할 점은
없겠군 그래.
과학의 영역 안에서 가능한 논쟁에서는 누가 옳다는 것이 없는 거지.
그는 초콜렛을 좋아하고, 그는 바닐라를 좋아해.
여기에는 누가 누구를
설득할 수 있는 부분이 없어.”
과학에서는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는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왼편에는 에드워드 위튼 (Edward Witten)이 있습니다.
그는 끈 이론 물리학자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주변의 가장 똑똑한 물리학자들에게
누가 가장 똑똑한 물리학자이냐고 묻는다면,
제 경험상으로는 답하는 사람의 절반이 위튼이라고 답할 겁니다.
다른 절반은 그 질문이 마음에 안 든다고 대답하더군요.
(웃음)
그렇다면, 만약 제가 물리학의 컨퍼런스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해보십시오. "끈이론은 순 뻥이에요.
이 이론은 나랑 안 맞습니다. 이것은 제가
미시적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과 다릅니다.
저는 이 이론이 마음에 안들어요."
(웃음)
아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저는 물리학자가 아니니까요.
저는 끈이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끈이론에 대해서는 테드 번디 입니다.
(웃음)
저는 저를 회원으로 맞을 그 어떤 끈이론 클럽에도 가입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그 포인트입니다.
우리가 사실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특정한 의견들은 반드시 배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전문적인 지식의 영역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고려해야할 지식이겠지요.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도덕적인 영역에는 도덕적인 전문지식,
도덕적인 재능, 또 심지어는 도덕적인 천재와 같은것이 없다고 확신해 왔을까요?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모든 의견들을 고려해야한다고 확신해 왔을까요?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모든 문화가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시각을 가졌다고
확신해 왔습니까?
탈레반 (Taliban) 이
물리학에 관해 고려할 만한
견해를 가지고 있나요? 아니죠.
(웃음)
그들이 인간의 행복과 안녕에
얼마나 무지한가요?
(박수)
그래서, 제 생각에는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번영과
사실의 영역과 연관된
도덕적 질문들에
옳고 그른 답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개인이나,
어떤 한 문화 자체가
잘못된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믿음이나 욕망이 필연적으로
불필요한 인간의 고통을
낳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것을 단지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도덕에 대한 담론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국경의 의미가
점점 축소되고, 언젠가는 그 의미 자체가
아예 없어질 시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파괴적인 기술로 가득찬 세계에 살고 있고,
이 기술들은 없어질 수 없습니다.
언제나 고치는 것보다
부수는 것이 더 쉬운 법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분명하게 말해서,
더이상은 인간의 행복과 안녕에 대한
현저하게 다른 가치관을
관대한 태도로 바라 볼 수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질병이 어떻게 퍼지냐에 대한 관념이나,
비행기나 건물의 안전상 수칙에 대한
다른 가치관을 존중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데 집중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에 답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박수)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 굉장히 민감한 주제들이 있었죠.
이 자리의 계신 분들 중 누구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밖에 계신 사람들 중에는
분노 같은 것으로 경악할 사람들이 있을 텐데요.
어떻게 말하느냐는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베일에 관해서 이야기 하실 때,
옷가방 속에 들어간 여성들에 관해 이야기 하셨는데요,
저는 무슬림 세계에서 살아 보았고 여러명의 무슬림 여성들과 이야기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들 중 몇몇은 뭔가 다른것을 말할 겁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아니에요, 그거 아세요? 이것은 축하하는거예요
여성의 특별함을 축하하는 것이에요.
그러한 여성성을 만들고, 그 특별함에 대한 결과예요..."
또 말하자면, 이것은 논쟁적으로 복잡한 심리적인 견해인데
"남성의 정욕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니에요." 라고 하는 거죠.
제 의미는, 문화적 제국주의자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여성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까?
샘 해리스: 네, 시계가 똑딱거리는 걸 보면서, 한 문장내로 하기 힘든 이 이야기를
꺼내려고 시도했었어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남성들에게는 여성에 대한 어떤 기대치가 있고
또 만약 여러분 스스로 베일을 쓰지 않는다면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취급받는 것이 보장된 사회에서
'자발적'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서, 만약 누군가 여기서
베일을 쓰고 싶어 한다거나
웃기게 생긴 모자를 쓰거나, 얼굴에 문신을 새기길 원한다면--
저는 누구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발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여성들이
속해있는 사회의 속박에 대해 정직해 져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들이 그들의 말을
완전히 믿어버려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특히 그들이 바깥 날씨가 섭씨 49 도 인데도
온 몸을 덮는 부르카(burqa)를 입고 있을 때는 말입니다.
크리스 앤더슨: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인 진보의 개념을 믿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조화롭게 진행되는 것이 가능할까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우리 모두가 획일적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일차원적인 곳이 되지 않으면서도,
조화롭게 조정되는 사회가 가능하다고 말하실 거 같아서요.
미래를 생각해 본다면 말이죠,
50년 후,
혹은 100년 후의, 도덕의 진보와 삶의 윤택함이
조화롭게 균형잡힌 사회를
어떻게 그리실 건지 궁금합니다.
샘 해리스: 글쎄요, 제 생각에는 우리가
뇌 구조의 여러 단계와 세부사항에 대해 연구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점점 더 이해해 나가는 길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모든 본질들을
더 자세히 이해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민과 동정심과 같은
긍정적인 사회적 감정들을 이해하게 될것이며,
우리는 그것들을 일으키는 요소들을
이해하게 될겁니다. 그것들이 유전학적이든지,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대화하냐에 대한 것이든지,
경제적인 체계에 관한 것이든지 말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밝혀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고려하자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사실에 대해
집중하게 될 것 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가능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여성을 욕망하는 남성들을 고려해서
제 딸이 태어나자마자 베일을 씌우는 것은
이 아이를 자신감 있고 교양 있게 커 가도록
교육시키는 것 만큼 좋은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의무적으로 베일을 쓰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미국 과학 재단(NSF)의 지원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는 두뇌를 정밀촬영할 수 있을 것이고 실제로
거기서 정보를 얻어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 사회에 사람들은 그들의 딸들을
보통 사람들이 사랑하듯 사랑할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거기에도 분명히 옳은 답이 있습니다.
크리스 앤더슨 : 조사의 결과가 그들이 남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딸들을 아낀다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이 문제에 대한 본인의 본능적인 판단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샘 해리스: 글쎄요, 네. 분명한 것은
망상에 사로잡힌 믿음 체계 안에서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나는 내 게이 아들이 애인이 생겼다면
지옥에 갈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그 친구의 목을 잘라버렸지.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 라고 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이 모든 부분을 쭉 놓고 보자면,
네, 저는 여러분이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넓은 의미에서의 복지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있는 복지를 말합니다.
한 사람이 환희에 가득차서
버스에서 자살폭탄테러를 일으키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죠.
크리스 앤더슨: 이것은 제가 정말 몇 시간 동안
나누고 싶은 대화네요.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지만, 다음번을 기약하죠. TED 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샘 해리스: 정말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