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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의 길”
11월 국제 아봐타 코스에서 한 해리 팔머의 강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아주세요.
여러분 뭔가 배우고 계시죠?
좀 더 배우시겠어요?
제가 와서 강의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아봐타® 교재의 배경이 되는
이론을 분명하게 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의
기본은 물질적으로 명확합니다.
이들은 대개 동의가 되며 테스트를 할 수 있습니다.
물질, 에너지, 힘 그리고
움직임에 관한 지식의 전부
즉 물질 과학입니다.
당신은 벽돌 벽을 뚫고서 걸어갈 순 없습니다.
테스트 해 볼 수 있어요.
얼음이 일정 온도에서 녹는 것도
시험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믿는 것만으로 건물에서 뛰어내려 날 수는 없습니다.
그냥 제 말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특정한 물리적 한계 안에서 삽니다.
만약 이런 한계를 어기면
바로 즉시 결과가 나오면서
종종 고통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확실한 것들을 연구해보고 싶으면,
반복되고 시험이 가능한
패턴을 찾아내세요.
많이 살펴보고,
예측하고, 시험을 많이 하고 나면
결국 지식이라고 부르는 정보를 얻을 것입니다.
지식은 사실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실들은, 시험해 보고 싶어하거나
보는 대상 누구에게나 확연합니다.
그것은 확실한 정보입니다.
지금 서있는 이 몸은 사실입니다.
어떤 사실이 의심의 여지 없는 증거로서 증명되면
온전한 사람들은 거의 다 믿습니다.
사실적인 것을 믿지 않으려는 것은
망상의 증세입니다.
자명한 사실들을 우리는 원리라고 합니다.
이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증명이 필요 없는 이론들입니다.
예를 들어,
똑 같은 대상이 둘 있을 때
이 둘은 서로 같습니다.
이런 것이 원리입니다.
진리는 혼돈스러운 말입니다.
물질 우주에서
진리는 실제 증거에 따라 결정되지만,
개인의 현실에서
진리는 주로 신념이나 믿음의 확실성에 따라 결정됩니다.
확실성을 토대로 한 진리는
실제 증거를 토대로 한 진리처럼 불변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신념의 확실성은 자신이 바꿀 수 있어요.
그래서 아봐타처럼 신념을 관리하는 기술이 가능하게 됩니다.
만약 진리를 척도로 보면,
중간쯤에서 실제 있는 것을
진리를 여기다가 믿음을 진리로 여기는 기준의 교차점이 있을 것입니다.
이 교차가 일어나는 경계 아래에 있는 것은, 그냥 입니다.
이 경계 위에 있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봅니다.
이 경계 아래의 사물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 지각합니다.
벽돌 벽은 그냥 벽돌 벽입니다.
이 경계 위쪽에서는 좀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벽돌 벽에 대해 믿고 있는 것,
즉 우리의 프라이머리가 지각하는 것을 생각으로 물들이고,
만약 그냥 놔두면 그 생각이
반응이나 감정적인 경험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특정한 단계의 과정을 거칩니다:
지각이,
신념에 의해 물들면,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생각이 반응이나 경험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매우 빠르게 일어납니다.
만약 사람의 순수의식을 저하시키면
지각이 없어지고
그저 신념만 남고,
그 신념이 반응을 만들어냅니다.
만약 사람의 순수의식을 더 저하시키면,
신념은 안 보이고 그저 생각이
반응을 만들어내는 것만 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방식이 이렇습니다.
벽돌 벽을 외부의 자극에 대한
비유로 사용해서 예를 들어드리죠.
실제로 단순하게 여러분이 벽돌 벽을 봅니다.
그것은 벽돌로 지어진 벽입니다.
고려할 것도 없고, 신념도 없고. 반응도 없어요.
그저 벽돌 벽입니다.
그렇지만, 과거에 어떤 이유에서
당신이 벽돌 벽은 밉다는
프라이머리를 했다고 해보세요.
이제 “그저 벽돌 벽”을 지각하는 것이
“벽돌 벽은 밉다”는
신념으로 여과되고,
당신의 생각은
“난 싫어”가 되지요.
그래서 벽돌 벽에 대한 저항을 경험합니다.
이해 되세요?
그 경계의 밑에서는 대상은 있는 그대로 이지만
그 경계 위에서는
우리의 생각대로 사물을 봅니다.
그 대상에 대한 생각은 이전에 자신이 했었던
프라이머리로 되돌아 가게 됩니다.
순수의식이 얼마나 깨어있고 고요한가의 정도에 따라,
또 그 사람이 얼마나 내면에서 깨어있는가에 따라,
자신이 벽돌 벽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 차릴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자신이 벽돌 벽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더 깊이 살펴보면, 자신이 벽돌 벽에 대해
비판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집중해보면, 벽돌 벽에 대해
비판하는 신념의 프라이머리를 했던
상황이나 조건들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운영하는 데는 이런 수준들이 있습니다:
맨 밑은 프라이머리 이고
그 위에 창조된 다른 신념이 있고,
그 위에는 그 신념에 의해 만들어진 생각들이 있고,
맨 위에는 그 사람의 생각에서 일어나는
반응과 경험이 있습니다.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어떤 수준에도 아봐타 도구를 사용해서
삶의 패턴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패턴을 더 깊은 수준에서 바꿀수록
그 변화는 더 오래 동안 지속됩니다.
당신은 반응을 만들어 내거나 없앨 수 있습니다.
생각을 창조하거나 소멸할 수 있습니다.
신념도 창조하거나 소멸할 수 있습니다.
또는 새로운 프라이머리를 창조하면서 세컨더리로 나오는
예전의 프라이머리들을 당신은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지식과 신념의 경계에서 어느 쪽에서
살고 있는 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의식을 운영하기 위한 기법은 물질 우주를
운영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둘을 혼돈하는 것은 심각한 실수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물질 세상에서 살아가는 특권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창조력과 소멸시키는 능력을
맞바꾸는 데 동의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벽돌 벽을 없애지 말라 입니다.
당신은 힘으로 그것을 변형시킬 수 있고,
공간에서 입자들을 재 정렬 할 수도 있고
심지어 다른 것으로 바꿀 수도 있었지만,
“팟, 소멸”하고 사라지는 것은 절대 없습니다.
창조에도 같은 법칙이 적용됩니다, “팟, 무에서 생겼다”는 없습니다.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데 이 사실이 처음에는
지독한 제약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양하게 배우기 위해서는
안정적이고 예측이 가능한 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물질 우주를 창조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쏟았고,
우리는 물리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모양 짓거나 변화시키는 데
스스로를 제약하기로 동의한 것입니다.
“팟”은 없습니다.
한 번 “팟”이면 모든 게 끝입니다.
원한다면 당신은 그 벽돌 벽을
(지식/신념의 경계 밑에 속하는 모든 것을)
공동의 물질 현실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생명감이 없는 현실 이예요;
그저 있습니다.
벽돌 벽을 보면 당신은
‘그래, 저건 벽돌 벽이야’ 합니다.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사실 벽을 똑바로 안보고 있거나,
통과해서 걸어나가려 하지 않거나, 그런 것이 아니면,
심지어 그 벽돌 벽은 존재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지식의 경계 위는
심리학, 철학, 신학, 형이상학 그리고 놀라지 마세요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그런 주제들에 부딪치게 되는 영역입니다.
당신의 현실은 벽돌 벽에 대해
자신이 가졌던 생각들로 구성됩니다.
벽이 아름답거나 밉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방해가 되거나
삶의 주된 장애물로 여길 수도 있어요.
자신의 모든 문제에 대해 벽돌 벽을 탓할 수 있습니다.
손에 멍이 들도록 주먹으로 벽을 치고는
바닥에 쓰러져 완전히 희생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신념이 창조하고
자신이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벽돌 벽 앞에서 완전히 끝나고,
망하고, 불행하고, 우울해하며
어쩔 수 없는 희생자로 누워 있습니다.
근데 보세요,
그 벽돌 벽은 그저 그 자리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벽에 대해 만들어 내고
경험하는 현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전혀 개의치를 않습니다.
만약 그 벽돌 벽 대신
당신의 어머니를 거기에 두면 어떨까요?
또는 못된 사람은요?
만약 악마는요?
들을 준비가 됐어요?
그들 누구도 당신이 만들어 내고
경험하는 현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자신의 현실로 창조하고
경험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각들입니다. 벽돌 벽이나
자신의 어머니
또는 못된 사람이나
악마에 대해 갖고 있는 당신의 신념을 토대로 한 생각들입니다
그런 신념들은 당신이 만든 프라이머리에서 생겨납니다.
벽돌 벽이나 어머니,
못된 사람이나 악마를
그냥 ‘팟’하고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벽돌 벽이나 어머니, 못된 사람이나 악마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신념 혹은 예전의 프라이머리 어떤 것이든
아봐타 도구로 마법처럼
“팟’하고 없앨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삶이 바뀝니다.
이것이 근원입니다.
당신의 의식을 관할하는 법칙들은
공동의 물질 우주를 관할하는 법칙과는 다릅니다.
당신이 자신의 신념들과 생각들을 바꾼다고 해서
엄마나 악한 사람 또는 악마자체가 바뀔까요?
글쎄, 당신 행동에 그들이
특정하게 반응할 때만 가능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당신이 바뀔 때 아마 그들도 바뀔 것입니다.
이것이 근원이 될 때 따라 오는 보너스입니다.
이런 걸 많이 보게 될 거예요.
만약 평범한 사람의 마음과 그 마음 안을 모두 비워 보려고 하면
내용물이 물질 우주의
정신적 복사본들이 대부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복사본들은 당신의 신념에 따라 꼬리표가 붙어 있습니다.
이 신념들 중 몇몇은 증거가 있기도 합니다
기억하죠, 의심의 여지 없는 증거로 증명이 되었을 때
온전한 사람이라면 그 사실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가 자신의 신념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증거는
오직 자신의 주관적인 확실성뿐입니다.
의심의 여지없는
객관적인 사실들 때문에 가지고 있는 신념보다
자신의 주관적인 확실성 때문에 갖고 있는 신념들이 더 많다는 사실은
뭔가가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주관적인 확실성은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것,
즉 자신의 경험을 변화시키려고 할 때 언급하게 되는 영역입니다.
제 말은, 벽돌 벽이나 엄마가 없어지거나 아니면
그 벽이나 엄마가 당신에게 사과를 해야만 당신 기분이 나아진다면,
그건 문제입니다.
또는 당신의 엄마도요...
그래서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영역은 확실성, 자신의 확신입니다;
그것은 실질적인 지식으로 이어지는 것의 경계 위에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현실을 운영하는 가치는
삶에서 경험하는 경험 모두가 확신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이 아봐타를 하기 이전의 신념들은 어디서 왔습니까?
어떤 상황 때문에 그 신념을 만들어 냈을까요?
물어볼 게 있어요:
여러분이 답을 모르는 질문들이 얼마나 됩니까?
신은 존재하는가?
이 세상에 정의는 있는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결과적으로 선이 악을 이길까?
선은 보상받는가?
악은 벌을 받는가?
물질 세상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는가?
이제, 이런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겠습니다.
정말로 솔직하겠습니다, 오케?
사실은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믿어야 할 사실은,
“나는 모른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제가 가장 솔직할 수 있는 것이
‘나는 모릅니다’예요.
“나는 모른다”는 솔직하긴 하지만 그다지 흡족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모른다는 상태를 마음이 편안해 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 받고 싶습니까?
그래, 옛날 해리죠, 아무 것도 몰라요.
글쎄, 그들이 옳습니다.
그리고 제가 모르는 것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의심이 점점 더 듭니다.
이제, 내가 믿기로 선택한 답과
제 주관에 확실하다고 여기는 답들이 있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해답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여러분이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갖고 있는 “모른다”에 답을 채워 주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으로서는 의도적인 친절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나는 모른다”에서 당신을 구해주려고요.
아니면 그저 당신의 동의를 얻음으로써 자기자신을 재확인할 수도 있어요.
혹은 당신이 어떤 것을 믿게 만들려는 숨은 의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역할은 “모른다”가 주는 압박감을 완화시켜줍니다.
종교는, 비범한 사람이 접근했던 신성한 진리로써
당신이 갖고 있는 “나는 모른다”를 위로해 줍니다.
그리고 당신은 대개 그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신성을 문제 삼고 싶지 않고,
둘째, “나는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기분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핵심은 어떤 해답을 믿음으로 수용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 답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자기의 이웃을 사랑하라 처럼 좋은 답일 수도 있고
믿지 않는 자는 모두 죽여라 처럼 나쁜 답일 수도 있어요.
왜 많은 사람들이 교의주입 되는지 이해가 되세요?
심지어는 완전히 꾸며낸 것이거나
자기 파괴적인 신념이 된다 해도 그 대답을 가치 있게 여깁니다.
학교에서 호명 당했던 때를 기억하세요?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수로가 로마의 멸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여러분은 “몰라요”라고 말하진 않죠.
당신은 진짜 영리하다고 보일만한 답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한 대답은요…당신은 모르죠.
선생님이, 당신에게서 답을 기대한다는 게 부정직하지 않습니까?
만약 교과서에 써있는 그대로 복창을 하면 좋아하셨겠죠.
어쩌면 여러분이 전혀 읽어보지도 않았을 거예요.
제 말은, 그 교과서를 쓴 사람도 정말 알고 있었을까요?
그 장소에 있었을까요?
의심의 여지없는 증거가 있었을까요,
아니면 그저 추측하면서 자신의 답을 당신에게 믿음으로 수용하라 하는 걸까요?
모른다”라는 상태는 사람들에게 압박감을 느끼게 하거나
답을 추측하고 상상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답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주관적으로 확실하다고 여기는 프라이머리를 궁극적으로 창조하면
그것이 곧 그들의 신념이 됩니다.
솔직히 몰라서 그냥 추측하는 상태인
사람의 의견을 당신이 사실이라고 동의한 것이
얼마나 될까요?
더 좋은 질문은:
솔직히 잘 모르는 사람이 당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는 의견에
불과한 것을 그대로 동의한 것이
얼마나 되나요?
그래서 우리 자신을 그만 속이고
이제 깨어나서 다른 사람이 답이라고 추측했던 많은 신념들을
자신이 답이라고 수용하고 있었음을 인정합시다.
가족이나 친구,
선생님 그리고 사회가 자신의 목적에 맞춰서
당신이 믿기를 바랬던 정보들을
그 추측에다 더 하면… 현대의 교육이 생겨납니다.
“과학과 종교가 언제나 서로 합의할 것인가?”
“기적은 정말로 일어나는가?”
“삶은 누가 발명했는가?”
“무엇이 진리인가?”
아시지만, 저는 모릅니다.
정말로, 저는 모릅니다.
“모른다”는 것은 어떤 진실 아래에 있는 기반입니다.
당신이 신념을 토대로
어떤 결정을 내리기 직전의 상태입니다.
한 신념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려면 반드시 그 신념을
다시 재 경험해야 하는 조건입니다.
“모른다”가 개인의 현실에서 공간을 정돈하고
새로운 신념들을 창조해내고 탐사할 수 있게 합니다.
“모른다”가 탐사와 모험을 유발합니다.
밝은 지구 문명®에서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여기,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와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어떤 신념을 더 믿었을 때,
삶이 더 좋아지고 행복해지고 더 성공하고 안전해집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
그 신념을 믿으면 다른 신념보다
삶을 더 좋아지게 합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더 좋다는 것이 자신의 현실을 모양 짓는 데에 사용하는 기준입니다.
더 좋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말로 결정하는 데는
많은 경험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음 달 후반 부 강의에서 또 탐사해 보겠습니다.
제가 드릴 질문 중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 정의가 있습니까?
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어떤 것을 믿는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참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른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신념 때문에 논쟁을 시작하면
양쪽 모두 부정직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정직했다면,
둘 다 “모른다”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 신념을 선택했던 것에
동의할거예요.
사람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오직 신념뿐이며,
그 신념은 쉽게 만들 수도 있고 지울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할 때,
옳고 그름의 게임은 잦아들고
함께 하는 게임이 펼쳐지면서
세계의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이런 통찰을 갖게 해 주는 것이 아봐타의 사명입니다.
아봐타를 하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 것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을 모릅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신념에
당신이 교의주입 됐으며 그런 신념들에 의문을 제기하면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념에 대해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은 대단한 시작입니다;
때로는 위험하기 조차 합니다.
대단한 용기와 자비심 그리고 지혜가 필요 합니다.
“만약 당신이
나라의 명령에 따라 누군가를 죽이면 그래도 살인일까요?”
“만약 당신이 종교의 이름 하에 누군가를 죽이면 그래도 살인일까요?”
자신의 신념에 대한 책임을 알아차리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극히 수치스러울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술을 마시고, 약물을 복용하고,
일을 하고 혹은 사회적 기준으로 자신을 마비시켜 무의식적으로 다시 잠들려고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책임을 일깨우는 사람이나
집단을 비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책임감을 죄의식이나 탓하기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책임을 고려해 보려면,
먼저 고백과 용서가 여러 번 필요합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함께 나누는 상태중의 하나는
모르는 것이 지독히도 많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통합하고 인정하면 이 세계는 훨씬 순조로워질 것입니다.
아봐타의 관점입니다:
“저는 정말 모르지만, 어떤 것을 믿으면
삶이 더 좋고, 순조롭고 그리고 즐거워 지는 것은 압니다.
또 다른 것을 믿으면
고통과 부조화가 일어나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만약 오래 살고,
여러 번의 전생을 충분히 기억해낼 수 있으면,
여러분은 어떤 신념이 사람들을 행복하고,
더 안정되고, 더욱 통제력이 있게 하는지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어떤 신념이 고통을 만드는 지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지혜입니다.
그리고 다음 마스터 코스에서 뜻대로 살게 하는
순수의식의 단계들을 살펴보고,
이익이 되는 신념들을 선택할 수 있는 기준 조건들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친절함과 자비심을 당신의 안내자로 삼으세요.
밝은 지구 문명의 창조에 기여하십시오.
제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을 아세요. 감사합니다.
아봐타에 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아봐타 마스터에게 연락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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