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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의 길
2009년 12월 5일에 녹화한 해리 팔머의 강의
감사합니다.
또 저예요?
점심 잘 드셨나봐요.
잠시 여러분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이 강의를 DVD로 보게 될 사람들을 위해
잠시 오리엔테이션을 하겠습니다.
이 시리즈의 첫 번째 강의에서
책임의 길에 대해 강의했습니다.
그것은 분노나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는 과정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의 목표가 남들의 보살핌을 받거나
희생자가 되는 것이 아니면,
자기의 삶에 대해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은 필요한 과정입니다.
외부 원인들이 더 이상
내면의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책임의 힘입니다.
당신 자신이 책임을 질 때, 사람들이나 사건에 반응할 것인가 아닌가의
선택권이 회복됩니다.
당신은 근원입니다.
아봐타의 뜻대로 살기입니다.
두 번째 강의인 자비심의 길은
현명한 신념들을 선택하고
가슴의식과 재 연결하는 내용의 강의였습니다.
머리의식, 즉 지성과 가슴의식은
함께 해야 합니다.
가슴이 지배적인 사람이
연쇄살인범인 사형수에게 청혼을 하거나,
머리가 지배적인 사람이 인종학살에 대한
정당화를 주장하는 일은 이 둘이 떨어져 있을 때 생깁니다.
이 둘이 균형이 잡혀야 합니다:
머리에서 일어나는 판단력과 가슴에서 일어나는 자비심의 균형입니다.
개인의 책임감을 일깨워서
머리와 가슴의식을 통합할 때 얻는 결실은 가치로 따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솔직함과 결단이 필요한 내면의 여정이며,
우리 모두가 거쳐야 하는 여정입니다.
이제 세 번째 길에 대해 강의하겠습니다.
이 길은 인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봉사의 길입니다.
이상적으로는, 봉사가
개인의 책임과 자비심을 행동으로 이어줍니다.
여러분의 삶은 진정한 영성의 길이며,
봉사하는 것이 이 여정에서 향상해 나가는 비결입니다.
좋은 소식은, 봉사의 길이
신나고, 도전적이고, 보람찹니다.
삶이라는 케이크 위에 있는 크림입니다.
봉사는 어떠한 정신적인 열반 그 너머로 가게 합니다.
봉사하는 보람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이롭고 멋집니다…
그리고 아봐타 들에게 믿을 수 없다는 말은 언급할 게 아닌 줄은 알지만…
사심 없이 도왔을 때 얼마나 심오하고 깊은 보람이
따르는지는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희생을 해서라도 도울 때
내면의 아주 높고, 영적이며 신비로운 존재가 태어납니다.
이런 관점을 일깨우는 것은 마치 차가운 바다에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불평과 항의를 끝내고 난 후에는
우리가 타인을 위한 봉사를 하기 위해서 태어났음이 명확하게 알아집니다;
이것이 삶의 최전선입니다.
봉사가 우리 존재를 가치 있게 만듭니다.
여러분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죠,
“오케, 해리, 그게 좋은 소식이라면, 나쁜 소식은 뭐예요..?”
부정적인 단면입니다.
봉사의 길은 너무도 매력적이고,
인류에게 유전처럼 전해져 왔기에
어떤 사람들은
개인의 책임이나 자비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봉사의 길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잠재적으로 위험을 만듭니다.
봉사하고, 일을 맡고
그 일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헌신하려는 데 대한
본능적인 갈망이 인류에게 너무도 강하게 깊이 배어서,
우리가 가진 상식을 넘어버립니다.
기꺼이 자기 몸에 폭탄을 차는 테러리스트는
광신적인 봉사에 사로잡혀서,
개인의 책임이나 자비심은 완전히 마비된 상태입니다.
자살폭탄범의 봉사하고자 하는 욕망을 복수심이 사로잡아 왔습니다.
통제와 지배에 목적을 둔 비양심적인 지도자들은
봉사하려는 갈망을 이용해서
수 백만 명의 젊은 군인들이 서로를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런 신념, 저런 신념에 봉사 하느라
혹은 국가의 손실 때문에,
또는 경쟁에 나온 부동산 조각을 두고 사람들은 당당한 것 같지만,
어리석게 죽어갔습니다.
전쟁은 봉사의 욕망을 이용한 착취입니다.
개인의 책임과 자비심에 대한 감각이 없거나,
교의주입에 억눌려온 사람들의 삶은
그렇게 유린됩니다.
개인의 책임과 자비심의 요소들을 빠트린 채
서투르게 대의를 위해 봉사를 하려 할 때
누구든지 실망과 착취 또는 그 이상을 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일을 성공시키고 완결하는 데 도덕적 책임을
차선으로 여기면 불가피하게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개인과
사회,
모든 나라에도 다 적용이 됩니다.
봉사는 행동이며,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따릅니다.
원인과 결과예요.
따라올 결과에 대한 책임 없이 행동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입니다.
기계가 그렇게 합니다;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세상 인구의 대다수가 파괴적이고,
잘못된 충고, 궁극적으로 자기파괴적인 그런 봉사에 가담하도록
사탕발림과 강요를 받아왔습니다.
신문이나
TV 방송을 보세요;
자기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추구하며,
정말로 원하지도 않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결과적으로는 우리 모두를 죽이게 되는 길을 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것이 봉사 하고자 하는 내적 욕망의 안 좋은 소식입니다.
개인의 책임과 자비심이 동반되지 않으면,
파괴적인 결과가 나도록 조종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강력한 원동력을 인류를 파괴하기보다는
이득이 될 수 있도록 바꿀 수 있는 해결책은,
인류가 개인의 책임과 자비심을 향상시키는
내면의 길을 가도록 일깨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더 많은 아봐타, 마스터, 위저드를 만듦으로써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겠어요?
진정한 의미에서 개인의 책임과
자비심의 길은
타인에 대한 봉사의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봉사 중 최상의 것은
그 사람의 책임감과 자비심을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저 돌고 도는 순환과정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커지고 확대되어 가는 소용돌이로서
결국은 밝은 지구 문명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전쟁을 선포할 거라면 아무도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커져 나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의를 더욱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자유로운 주의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 교실의 모든 분들은 책임감을 지는 정도가 크고,
머리와 가슴 의식을
통합하는 과정을 잘 따라가고 있다고
여기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타인에게 봉사하느라 바빠질 때입니다.
“네 정말, 누군가에게 봉사 해야죠.
봉사 해야죠.
악마일 수도, 주님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봉사 해야죠.”
봉사 해야죠.
“네 그래요, 누군가에게 봉사 해야죠.
봉사 해야죠.
악마일 수도, 주님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봉사 해야죠.”
봉사 해야죠.
밥 딜런에게 사과합니다…
“봉사하다(serve)”는 낱말의 어원을
영어 큰 사전에서 찾아보면,
그 뜻은:
봉사하다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에서 진화된 말입니다.
영어권의 사람들은
낱말의 첫 음절을 빼는 버릇이 있어서,
“헤더 해빋” 대신에 “더 빋”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DESERVE에서 앞 DE가 빠지고
SERVE(봉사)라고 발음했습니다.
그래서 봉사의 뿌리에는
당신이 지지하고 있는 사람, 단체 또는 나라가
그럴만한 가치와 자격이 있다는 개념이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이 결단이 쉬웠습니다.
그 사람의 태생과 그 사람이 하는 고상한 행동을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중세 기사들과
왕족들이 따랐던 기사도는
누구를 섬기고 누구를 섬기지 말아야 하는 지시였습니다.
특정한 집단을 섬기도록 요구하는
관례나 법률을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교의주입의 시작이었으며
동시에 개인의 책임과
자비심의 종지부였습니다
기사도는 응당한 마감을 맞았지만,
그 잘못된 점이 후손에게로 전해졌습니다.
군대 장군들이 기사와 왕들을 대신했고,
무조건 적을 무찌른다는 의도가 자비심을
약점으로 취급했습니다.
20세기가 되면서
자비심 대신에 군대가 행사할 수 있는
무력을 알려주는 “무력행사의 원칙”이 들어섰습니다.
개인의 책임은 명령을 따르는 것으로 줄어들었고
파괴적인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 하는 것은
반항과 반역으로 여겨졌습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공포정치 시대에
죄수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사형집행인들은
눈을 맞추는 게 금지되었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죽일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면
나중에 참회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람에게 폭력이나 파괴적인 행동을 시키려면
공식적인 명령에 개인의 책임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도덕성은 갑자기 오웰처럼 (조직에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이 됩니다.
“너희는 살인하지 말지어다…
명령을 받을 때까지는.”
모든 사악한 행동에 대한 정당화는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였습니다.
여담으로,
제게 공식적으로 십계명을 개정해달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만약 그랬다면
11번째 계명은 이럴 겁니다:
“너희가 죽인 것은 너희가 먹을지어다.”
많은 게 다뤄지죠…
문제를 아시겠어요?
처음에는 개인의 책임과
자비심의 의미 퇴색이
나중에는 교의주입으로 억압 됐습니다.
우리가 종족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자질들을 우리 스스로 회복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여러분이 처음은 아니지만,
여러분은 말로만 이 아닌 행동을 하기 시작한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라고 믿어도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박수를 보냅니다…
아봐타 마스터로서 하는 좋은 일과 기여하는 봉사는
정당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 이유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물어야 할 질문은 단 하나:
우리가 하는 행동이
사람들의 책임감과 자비심을 향상시키는가? 입니다.
아봐타 마스터는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용서와 친절은 자비심을 깨웁니다;
자비심과 선의는 개인의 책임감을 키워줍니다.
“네, 당신은 누군가에게 봉사 해야죠.
봉사 해야죠.
악마일 수도, 주님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봉사 해야죠.”
봉사 해야죠.
이 시대 최고의 시인 중
한 사람이 쓴 훌륭한 노래입니다.
봉사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봉사와
타인에 대한 봉사입니다.
어느 정도 합당하게 자신을 돌보는 마음 외에는,
봉사는 거의가 다른 사람을 염려하는 행동과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행동입니다.
타인에 대한 봉사에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최고가 두 가지입니다.
첫 째는,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서로 서로에게 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후원해주면 강력한 팀이 됩니다.
자신에게만 봉사하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홀로 남고 불행해지는 이유는
자기 봉사하는 사람 스스로가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봉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계산 해보세요.
이기적인 사람이 봉사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어요?
아니죠.
그래서 자신에 대한 봉사는 동기가 약하고
가치가 거의 없습니다.
약물 중독자, 범죄자 그리고 정신이상자들이
자기 생각에 취해서 남들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이들이 회복하는 길은 완전히 바닥을 치는 그 날 시작됩니다.
만약 당신이 그들의 추락을 지연시키고만 있다면 돕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모진 사랑이지만, 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삶의 어려움은 있지만 좋은 자질이 있고
그래서 여러분의 도움에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판단력은 가슴의 자비심에 머리가 기여하는 것입니다.
판단력이 없으면
무가치한 사람을 위한 봉사에 바로 고갈되어서
결국 아무도 봉사를 못 받는 결과가 나옵니다.
때로는 상처도 선별해서
가망 없는 곳에 여러분의 도움을 허비하기보다는
반대로 가장 적은 주의와 지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필요합니다.
밝은 지구 문명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을 계획적으로 쓰는 것이 필요합니다.
타인에 대한 봉사를 머리로 하면 영리한 사업입니다.
타인에 대한 봉사를 가슴에서 하면 보살핌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 둘을 겸비할 때,
여러분의 봉사는 지도자의 자질을 갖게 됩니다.
타인에 대한 봉사는 어떤 지도자에게도 가장 핵심이 되는 본분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실제 책임자가 아닌 경우라 해도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좋은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시카고 대학의 심리학자가
최근 사회적 네트웍에서 행동의 확산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사람들의 행동이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만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만 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그 주변 사람들의 주변 사람,
또 그들의 주변 사람들까지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모범은 세가지 수준에서 영향을 미칩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가진 힘보다도 더 큰 힘이 바로 이것입니다.
개인의 책임과 자비심을 자신의 삶에
접목시킨 사람들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받을만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봉사를 합니다.
좋은 자질을 가진 사람들을 돕고,
중요한 사회적 목표에 기여하는 것은 현명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삶에서
더 많은 에너지와 신나는 즐거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관찰한 사람이 제가 처음이 아닙니다.
말일 성도 그리스도교에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들은
결국 시들어 죽는 반면
다른 이들을 향한 봉사 속에서 자신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은 성장하고 번창한다."
심지어 미국 농산부가 운영하는 4-H
청소년 단체에서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타인에 대한 봉사로 인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 바로 자신을 찾게 된다.”
불행히도 자비심이나 개인의 책임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그들도 봉사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그리스도 선교회를 창립한 테레사 수녀님은
이 지혜를 시에 담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침묵의 열매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열매는 봉사입니다.
그리고 봉사의 열매는 평화입니다.
불교의 기본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모든 고난은 자기 자신의 행복을 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너희 이웃을 섬기지 않고는 신을 섬길 수 없다.
그래서 여러분의 봉사하는 프라이머리,
“나는 밝은 지구 문명 창조에 기여한다”는
아주 오래된 지혜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개인의 책임, 자비심
그리고 선의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봉사는 아봐타의 주춧돌입니다.
이 자질들을 모두 잘 키우면,
여러분이 심는 씨앗들이 자랄 것입니다.
저는 미래의 세대들이 여러분에게 감사할 것을 가슴으로 압니다.
그래서 저 또한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길에 대한 이 강의의 시작부분에서
아봐타 교재의 배후에 있는 몇 가지 기본적인 이론과 의도를 제가 확실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행여라도 그것을
어느 정도 이루었기를 바랍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저를 지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멋진 하루 보내세요.
아봐타에 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아봐타 마스터에게 연락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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