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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아주 심오한 질문을
화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그 소리를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나무가 소리를 낼까요?
여러분 모두 이 질문을 알고 계실 겁니다.
이 질문은 300여년 넘게 철학자들의 관심을 끌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 자체가 이 나무에 이웃하는 식물들한테는
아주 우스꽝스럽게 들릴 겁니다.
이웃에 사는 식물들은 쓰러진 이 나무로부터
수십년간 메시지와 신호를 받았으니까요.
오늘은 제가 식물의 소통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식물들이 자신들의 주변 환경에 대해서
어떻게 서로 배우는가에 관해 말씀드리죠.
우리는 모두 그런 의사소통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식물은 동물과 늘 소통합니다.
우리처럼 멋진 포유류와 소통하기 보다는
화면에 보시는 벌레와 새처럼
작은 생물들과 더 많이 소통합니다.
식물들은 아주 화려한 꽃을 피워서 동물들의 관심을 끌고
꽃가루받이가 이루어지도록 하지요.
이것이 식물들이 하는 성생활의 일부이죠.
식물들이 소통하는 한 방법입니다.
다른 방법은 --
식물들은 자신의 씨앗을 옮겨줄 서비스가 필요하죠.
그래서 맛있는 과일을 만들어
그 안에 작고 달콤한 당분을 넣어두죠.
그러면 포유류나 다른 생물들이 씨앗을
새로운 곳, 새로운 환경으로 옮겨줍니다.
이것도 소통입니다 - 색깔을 보세요.
우리와 소통할 뿐 아니라,
다른 수많은 생물들과 소통합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식물들이 선택하는 아주 쉬운 방법이고
동물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의존하고 있어요.
이것은 모두 그 동물들이 뇌를 가졌다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동물들은 과일을 고를지,
꽃을 찾아갈지 결정할 수 있어요.
이런 것에는 뇌를 사용하죠.
그 배경에는 결정, 모터와 엔진이 있어요.
식물한테 있는게 아니라 동물한테 있는 거죠.
하지만 저희 연구는 뭔가 다른 것을 하고자 합니다.
식물들이 자기들끼리 또는 다른 식물들과
소통할 수 있는지 알아내고자 합니다.
한 가지 좋은 보기는
'말하는 나무'라는 현상입니다.
이건 저희 연구가 아니라 다른 연구의 결과입니다. --
전 세계에 있는 여러 연구소들에서 나온 결과들이죠.
나무는 같은 곳에 박혀있어요. 거의 다 그렇죠.
일단 뿌리를 내리면 그 자리에서
평생 머무르게 됩니다.
때로는 수백년씩 머무르겠죠.
나무는 도망칠 수도 없고
이게 나무의 삶을 아주 힘들게 만들어요.
나무를 잡아먹으려는 생물들이 아주 많으니까요.
수 많은 곤충과 포유류, 그리고 다른 생물들이
그냥 다가와서 나무를 뜯어 먹습니다.
나무한테 득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어요.
어쨌든, 생물들한테 뜯어먹히는데서
식물들이 스스로 방어할 방법은 여러가지 있어요.
한가지 방법은
온갖 종류의 고약한 화학 물질을 내뿜거나 지니고 있는 겁니다.
화학 물질을 갖고 있으면,
방목가축이나 초식동물의 일부는 막을 수 있어요.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나무를 먹고 싶어하거든요.
사실 식물은 다른 일도 해냅니다.
식물을 씹어먹는 일이 일어나면,
어떤 식물들은 온갖 냄새나
휘발성 물질을 내뿜을 수도 있어요.
이런 것들은 공기를 통해 같은 식물의 다른 부분이나
다른 이웃식물들에게 전달이 되죠.
이런 메세지를 받으면
그러니까 다른 식물로부터 이런 신호를 받으면
독성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이걸로 공격을 막죠 - 이 경우는 곤충이 되겠죠.
뇌가 없는 생물들한테는 이런 게
상당히 복잡한 행동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밖에 나무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눌게 있을까요? (웃음)
이 부분이 저희 연구진이 다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저희 프로젝트에서 묻는 특별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식물들이 엿들을 수 있는가 - 힘겨워하는 소리,
이웃이 겪는 스트레스를 들을 수 있는가.
그리고 이런 정보를 이용하여
나중에 어려움에 잘 대처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죠.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해보시죠.
한 식물이 있는데,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났어요.
가뭄이 들거나 소금기가 올라간 것과 같은 스트레스죠.
이 나라에 있는 우리 모두는 잘 알겠죠, 스트레스도 받구요.
상황이 매우 안좋은데, 제가 의문을 갖는 점은
이웃 식물이,
다른 식물이 받는 스트레스를 알지 못하는 식물이
그런 정보를 감지하거나
소통을 하고 뭔가 대처를 하겠는가 하는 겁니다.
여기 빨간 화살표에 대해 묻고 있는 겁니다.
이런걸 어떻게 하죠?
필요한 건 씨앗 한 뭉치와
칼이나 가위만 있으면 됩니다.
식물뿌리를 자르고 -
그러면 곧바로 다른 뿌리들을 많이 만들어내겠죠.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선택해서, 이건 아주 쉬워서
5살 짜리도 할 수 있어요, 두 뿌리만 있는 식물을 고릅니다.
그러니까 뿌리가 6개 나오면, 4개는 잘라버리는거죠.
거의 비슷한 뿌리 2개만 남겨서
이렇게 심어둡니다:
중간에 한 화분을 공유하는거죠.
중간에 한 화분을 공유하면 식물이 원할 때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되죠.
이렇게 해서 뿌리를 통한 소통이 가능합니다.
물론 소통을 위한 다른 방법이 있겠죠.
같은 방식으로 나뭇잎끼리도 소통하겠죠.
저희가 예전에 논의했는데,
공기중에서 [휘발성 화학성분] 을 이용하는 거죠.
저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저희는 식물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한쪽 뿌리에 스트레스를 줬어요
이 녀석은 분명히 고초를 겪을텐데요,
저희는 다른 녀석들이 이런 상황에
대응을 하는지 보기로 했습니다.
좋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측정할까요?
연구하기 쉬운 뭔가 찾아야했죠.
측정하기 쉽고 반응이 빠른 것을 찾아야 했어요.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생리학적 현상 말이죠.
그런 것중에 하나는
식물이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잎을 열고 닫는 방법입니다.
여기 보시는 것은
천 배로 확대된 화면인데요,
모든 식물이 잎에 가지고 있는 기공입니다.
기공으로 주변환경과
가스를 교환합니다.
이들 기공은 열 수 있고 매우 유연합니다.
셔터 같아요 -
매우 재빠르게 여닫을 수 있어요 -
기공으로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고 산소를 내뿜어요.
어쨌든, 이것은 우리가
이 지구에서 저항하거나 살아남도록 해줍니다.
그래서 식물이 편안하면, 기공을 열죠.
어떤 스트레스의 징조도 없어요,
이런 모습인데요 - 열린 기공이에요.
기공은 작은 구멍이에요.
식물이 언짢거나, 어떤 문제가 있다 싶으면,
가뭄같은 거죠, 그러면 이 작은 기공들을 닫습니다.
이건 측정이 가능하죠. 사진을 찍고
손쉽게 측정할 수 있습니다.
편안한 식물들이에요. 이런 식물들을 한 무리 골랐습니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줄 녀석과 그 이웃이죠.
스트레스가 없으면 편안하죠.
아주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 기공을 보세요 -
여러분들에게 미소짓고 있죠?
그렇게 편안한 상태입니다.
식물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한쪽 뿌리에
가뭄과 같은 스트레스를 주면 어떻게 될까요?
상황이 나빠지니까 기공을 닫습니다.
작은 구멍, 작은 숨구멍을 닫죠.
그런데 그 이웃에 있는 녀석은 전혀 해를 입지 않았는데,
스트레스를 받은 적도 없는데 뭔가를 느낍니다.
소통이 있는거죠. 왜 엿들을까요?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이웃 녀석이 왜
그런 정보를 사용하는걸까요? 스트레스를 주지도 않았는데요.
음, 많은 경우에, 이웃이 지금 스트레스를 받으면
몇 분 안에, 몇 시간 안에, 또는 며칠 안에
내가 스트레스를 받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그러니까 대비를 하는 게 좋습니다.
미래에 대한 대비는
진화에서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어떤 생물들의 생태에서도 마찬가지지요.
훨씬 더 흥미롭고 어려운 질문은
스트레스를 받은 녀석이 왜
이웃한테 그런 정보를 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쨌든 그 이웃들이 적이거나 경쟁자들일 수도 있는데요.
자, 많은 경우에 식물들은 엄청 커다란 군집을 이루죠.
축구장 몇 개만한 크기를 이루기도 합니다.
생물량은 수백톤이 될 수 있어요.
엄청나게 큰 경우겠죠.
한 구석이나 한 무리에서 공격을 받으면,
그런 정보를 나머지 식물들에게
퍼트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중 일부는 복제를 해서 커다랄 수도 있어요.
그들에게는 뒷마당에 자라는 잔디처럼
퍼져나가는 쌍둥이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가 먹는 딸기나 자작나무도 그렇죠.
그들은 모두 복제된 개체들이고, 서로 연관이 있는
수많은 개체들이 있거든요.
그들중 일부는 서로 단절되어 분리된 개체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소식을, 경고를 널리 알리는게 좋겠죠.
스트레스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논리가 맞다면,
훨씬 더 정교한 뭔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스트레스가 없는 식물이 이웃과 정보를 나누는거죠.
스트레스를 받은 식물이 공유할 뿐만 아니라
스크레스가 없는 식물도 더 멀리 있는 다른 이웃과
그 정보를 공유한다는거죠, 아시겠죠?
실험은 간단합니다. 방법을 알고 계시니까,
이제 저같은 과학자가 되시겠네요.
이런 시스템을 이용하는데,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알고 있는거죠 - 첫번째 이웃이 반응하고
소통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더 많은 이웃을 넣습니다.
그리고는 같은 질문을 하는거죠.
이 정보가 그들한테 전달될까요?
스크레스를 받지 않는 이웃이 새로 넣은 이웃과
정보를 나눌까요?
이건 15분 뒤입니다. 겨우 15분이요!
3개의 식물이 기공을 닫습니다.
그러니까 정보가 전달된다는 뜻이죠.
스크레스를 받지 않은 식물이 정보를 공유한다는 겁니다.
겨우 한 시간안에, 연달아 있는 5개의 식물이 모두 공유합니다.
제가 좀 더 열심히 하면,
제 연구원들이 더 열심히 하면,
저는 10번째 식물에도 전달될거라고 자신합니다.
그러니까 여기 스크레스를 받지 않은 식물들은
정보를 전달하기도 하고 공유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일이 뇌가 없는 식물들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기억해두세요!
지금까지 꽤 괜찮았죠? 그런데 저희가
소통과 정보가 공유된다는 것은 보여드렸지만
이런 일들이 뿌리를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은
아직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뿌리를 공유하는 시스템에서 일어난 일이죠?
뿌리를 통해서인지,
땅위로 자란 싹이나 잎을 통해서인지,
휘발성 화학물질을 통해서인지 시험하려면 뿌리를 공유하지 않는
다른 식물들을 넣어봐야 합니다.
뿌리를 공유하지 않는 식물들 사이에서는
실제로 소통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스트레스에 대한 신호의 교환이
뿌리사이에 일어난다는 것을 바로 증명해주죠.
그런데 여기엔 더 깊은 의문점이 있어요.
제가 단언했듯이 기공은 극도로 빠르게 움직입니다.
기공은 몇 초, 몇 분안에 여닫을 수 있거든요.
기공은 몇 초 뒤에, 몇 순간 뒤에
다시 열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건 그들이 "거짓 경고" 신호를 받았을 때
보이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이건 좀 의심스럽습니다.
꼭 필요한 게 아닐 지도 모르고,
실제 생활에선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요.
여기서 심오한 질문은 식물이
과거 경험으로부터 뭔가를 배워,
스트레스를 받은 식물과 함께 대처하여
미래에 겪을지 모르는 어려움에 맞서 살아남겠는가 하는 질문이에요.
지금 경우에는 가뭄이죠.
이걸 실험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미 알고 계신 시스템을 사용합니다.
화분속에 뿌리를 공유하는 식물들이 한 줄 있습니다:
하나는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것이죠
또 다른 하나는 스트레스를 주는 겁니다.
어떻게 스트레스를 주거나 안 주거나 할까요?
같은 줄에 있는 한 나무의 한 뿌리에만 스트레스를 줍니다. 그게 다에요.
그리고는 전체 시스템을 진짜 가뭄에 노출시켜 보는 겁니다.
이건 진짜 실험이에요!
실제 생활에선 기공을 깜박거리진 않겠죠?
실생활에서는요.
이건 편안한 식물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은 이웃을 만난 적이 없는 녀석이죠.
한 달이 지나서 이 녀석은 완전히 말라버렸어요.
한 여름 이스라엘의 온실은
섭씨 40도 될 겁니다.
좋아요, 여기 계신 분들한테는 놀랄 일이 아니죠.
하지만 이 녀석, 이 무리는
가뭄에 노출된 적이 있는 뿌리를 갖고 있어요.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가뭄에 노출되기 전에 말이죠.
한 달뒤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물을 더 줘서 그런 게 아니에요.
이건 식물의 경험으로부터,
과거 어느 시점에 가뭄에 노출된 적이 있는
이웃과 소통한 경험에서
그 정보를 써서, 어떻게든 그 정보를 저장하고
나중에 그걸 사용하여
그 후에 오는 가뭄에 더 잘 대응하고 살아남은 겁니다.
뇌가 없는 생물들이
배우고 기억해낸 것이죠.
이건 대단한 학습이죠!
이런 학습은 보잘 것없는 생물이
뇌가 없어도 배우고 기억해서
나중에 더 잘 살아남으려고
환경정보를 이용하는 거죠.
저희 실험실 구성원들에게 감사하고 싶군요.
오메르 맬릭 박사가 전체 과정을 관장했고
대부분의 실험을 감독했습니다. 이샤이 호프만,
요네 모르도크, 다니멜 벤-나탄 시온,
미리 바누누, 그리고 오론 골드슈타인:
그리고 이스레엘 과학재단의
넉넉한 재정 지원에도 감사드립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