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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책임, 자비심, 그리고 타인을 위한 봉사
10월 프로코스에서 한 해리 팔머의 강의 (2009년 10월 22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매우 감사 합니다.
여기 캐나다에서 오신 분 계세요?
캐나다 거위들이 오늘 아침 무사히
롱우드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정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캐나다 거위들이 커다란 V자형을 그리면서
머리위로 낮게 맴을 돌았어요.
꺅, 꺅,
괜찮아요, 봄이 되면 우리가 선글라스와 티셔츠를 입혀서 집으로 돌려 보내겠어요.
자-프로 코스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우와.
사상 최대의 프로코스를 만들어 주신
큐엠들께 감사 드립니다.
잘 했어요, 여러분.
아시죠,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면 여러분이 사회도 변화시키게 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변화는 향상해 나가는 변화이지만,
다른 방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스타스 에지사 방침의 기본 원칙입니다:
충분한 수의 사회를 변화시키면 문명이 변화합니다.
이렇게 하는 가장 온화한 방법이 한 번에 한 사람씩 해나가는 것입니다.
아봐타 코스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과
영성의 깨어남을 가져다 줍니다.
여러분이 아봐타 경험에서 가장 먼저 기대할 수 있는 변화는
자아의식이 깨어납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통합과
자기 통제의 사다리를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사다리의 제일 위가 자기 수용입니다.
나는 나인 것이 행복하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친구가 되기 이전에
먼저 자신에게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수용성으로써 여러분은
자아상과 한정의 층들을 벗겨내고,
자신이 정말로 누구인가를 아는
진리를 발견합니다.
여러분은 몸 그 이상이며;
두뇌에서 일어나는 전기불꽃 이상입니다;
여러분은 거꾸로 생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마음 이상입니다.
자신이 발견해 내는 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자신이 정말로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것이,
이 우주 전체보다도 더 오랫동안 존재했던,
거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순수의식으로 가는 문을 열어줍니다.
이제 깨달음이 시작됩니다.
이게 나입니다.
이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 입니다.
한 사람을 아봐타로 탄생시키는 것이
어떤 교리를 믿게 만들거나 설득하는 것보다
이 세계를 향상시키는데 훨씬 더 좋은 접근법입니다.
사람의 모든 문제를
바로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그 사람의 문제를 확실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사회들,
특히 민주주의 원칙 하에 있는 사회는
참여하는 개인들의
일반적인 태도를 반영하고 형성합니다.
번창하기를 바라는 사회는
개인의 책임,
자비심 그리고
타인을 위한 봉사에 높은 가치를 둘 것입니다.
한 사회가 확대되고 있는지
줄어들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것은
이 세 가지 자질들,
개인의 책임, 자비심, 그리고 타인을 위한 봉사가
사회에 퍼져있는 정도로 알게 됩니다.
한 개인이나 집단이 상승하고 있는지
쇠퇴하고 있는지도 물론 같은 지표로 알게 됩니다.
한 사회나 단체 또는 개인을 향상시키고 싶으면,
이런 부분-
개인의 책임,
자비심, 또는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중
하나를 향상시킴으로써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자질이 향상하면, “우리”라는 태도가 길러집니다.
“우리”라는 태도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
바로 상승해가는 단체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이 세 가지 자질,
즉 개인의 책임,
자비심, 그리고 타인을 위한 봉사가 부족하면
결과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나”라는 태도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내가 우선이다,
내가 이길 것이다,
내게 더 달라.
이기적이며
쇠퇴하고 있는 전형적인
개인과 단체입니다.
이기심이 단체를 파괴합니다.
이것이 마음에 고통을 가져오는 원인입니다.
자신만을 위하고,
이기적인 태도들은
개인이나 사회,
또는 전체 문명이
분리와 갈등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들입니다.
만약
제 관심사가 나 자신이나,
또는 내 친구, 내 가족을 위해서
뭔가를 얻어내는 데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해보세요.
그리고 당신의 관심사도 주로 당신 자신이나, 당신의 친구들, 당신 가족들을 위해서 뭔가를 얻어내는 데 있다면,
우리는 경쟁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결국 갈등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깜짝 놀랄 사실입니다.
우리가 만약 경쟁을 하면,
친구일 때 소비하는 천연자원의 최소 두 배 이상을
소비해야 될 것입니다.
천연자원을
어떻게 보존할 수 있는지 알고 싶으면,
친구를 만드세요.
친구들은 함께 나눕니다.
자신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서는
오직 더 많은 것-더 많은 물건들,
더 많은 주의, 더 많은 공간-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이
이기심의 뿌리에 있습니다.
이것은 안 좋은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더 많은 것을 얻어내면 낼수록,
지켜야 하는 것들이 많아지고,
또 꼭 당신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지켜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들을 믿을 수가 없는데, 그들도 꼭 당신처럼 생각 하고 있으면,
그 사람들 역시 당신을 믿지 못할 것입니다.
이 방법이 좋지 않은 두 번째 이유는
이기적인 행동에 대한 정당화는
자기 중요성으로 이어지고,
당신이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매일의 삶을 살아 갈 때 오는 고통들이
더욱 강렬해지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내가 누군지 몰라?”
찰스 디킨즈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의
주인공인 에베네저 스크루지는
이기심의 원형입니다.
또 다른 원형이 되는 인물은
스타 트렉에 나오는
페렌지 쿼크입니다.
쿼크가 얻어 낼 때의 원칙은
“이익 앞에서는 절대 우정을 논하지 말라”였습니다.
보세요, 이것은 제가 권해드릴 행위의 규범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행동을
다스리기 위한 행동의 규범이 어떤 것이든,
다른 사람도 같은 규범으로 행동했을 때
일어날 결과 또한 예측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당신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면
조화로워 질까요,
아니면 갈등일까요?
당신이 남에게서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당신도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하십시오.
이것이 공자의 황금법칙입니다.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에만 에너지를 다 쓰는 사람들,
“나를 위해서”라는 사람들은,
결국 비참하고, 희생된 느낌을 느끼며,
보통 홀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의 주의와 자원을
자신들의 행복에만 집중하는 단체나 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들은 결국 적대적이고,
고립되고, 편협해집니다.
그들은 벽을 세우고,
다른 집단과 갈등을 일으켜
결국 전쟁에 가다합니다.
두 집단이 갈등 상태에 있으면
만약 그 들이 친구였을 때 소비하게 될
천연자원의 최소 백 배를
소비해야 할 것입니다.
천연자원을 보존하고 싶으면, 친구를 만드세요.
누군가 이걸 티셔츠로 만들어야겠습니다.
오케, 제가 설교를 했군요.
아브라가 지금 막 눈을 돌리는 걸 봤습니다.
그저 이 말을 생각하세요:
“막다른 길”이라고 써있는 표지판을 보시면,
이기심의 결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책임,
자비심,
그리고 타인을 위한 봉사는
사회나 개인이 더 큰 행복과 안전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타인의 행복에 관심이 있으면,
우리는 갈등보다 조화를,
경쟁보다 협동을 창조해 낼 것이며,
우리 주변의 조건들이 모두 향상될 것입니다.
정신적인 갈등들,
즉 애착, 오만, 적의, 원한, 그리고 질투에 의해 일어나는
이 모든 갈등들은 이기심이 사라질 때
다 없어질 것입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아주 어리석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주는 것이 타인을 위한 봉사라는 개념에
오히려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어버립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데 당신이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나이도 들고,
능력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말 타인을 위한 봉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이성이 필요합니다.
8세기의 불교학자였던 산티디바는
이것을 아주 심오하게 표현했습니다.
“복잡하게 말 할 필요가 뭐겠는가?”라고 하면서,
“바보들은 자기자신의 행복을 찾는 반면
현자들은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행동한다.
그저 그 둘의 차이를 보라.”
사람의 태도를 이기심에서
봉사 쪽으로 전환시키는
깨달음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우리가 죽음을 맞게 되는 존재라는 진리를 그대로 직면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려내고
보호하는 보물들이 내일은 다른 이에게 속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이기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고 있는 신념들이
미래에 다가올 결과에 우리의 영혼을 묶어 놓을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의 책임,
자비심,
그리고 타인을 위한 봉사는
우리를 구원해주는 품성입니다.
1871년, 훌륭한 남부동맹의 장군이자,
프리메이슨 지역지부의 군주대사령관이었던
알버트 파이크는
도덕과 교의라는
육중한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우리 자신만을 위해 한 일은 우리와 함께 죽지만,
우리가 다른 이들과 세계를 위해서 한 일은 살아 남는다.”라고 했습니다.
좋은 인용구죠.
이뿐만 아니라.
그는 또 개인과 집단이 박해를 받으면
정화가 되므로, 길게 보면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이
결국 자신에게 이득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된다고도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적에게 자비심을 행할 때
기억해둘 만한 말입니다.
한 사람의 태도를 이기심에서
타인에 대한 봉사로 바꿔줄 또 다른 깨달음은
죽음의 두려움만큼 극적이지는 않지만
그저 이 안에 우리 모두가 함께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 않고 훨씬 더 비슷합니다.
당신이 정말로 멈춰 서서 다른 사람을 바라볼때,
그들에 대한 당신 자신의 이야기 너머를 보고,
그들도 당신이 겪었던 것과 같은 질병, 불행,
손실을 겪고 있음을 보고 나면,
갑자기 그들을 돕고자 하는
진지한 바램이 생깁니다.
여러분의 도움은 힘을 뺏기보다는 힘을 부여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물고기 낚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 사람의 문제들을 풀어줄 수 없으면,
최소한 진정으로 그 사람을 위해 축복을 기원할 수는 있습니다.
자비심의 느낌 안에는
누군가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고자 하는 바램이 있으며,
당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경우
그래도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위해 그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종류의 기도를 중보기도라 합니다.
이것은 시리어스 드릴이나 자비심 연습과 같은
범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에서 행할 수 있는
가장 크고 강력한 미덕의 하나를
자비심으로 치고 있습니다.
달라이라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바라면,
자비심을 행하십시오.
만약 당신 자신이 행복해지길 바라면,
자비심을 행하십시오.”
이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호의의 느낌
(자기 수용)에서 시작되어,
다른 이들을 향한 호의의 느낌으로 자라납니다.
당신이 자비롭기 위해서 누군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마음을 열고,
베풀며, 판단 분별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고, 신뢰하며, 우정을 베푸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비심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 잠들어 있고,
때로는 일깨우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합니다.
자비심에 대해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스티븐 구디어라는
기독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 가족이 키우던 개가 강아지 12마리를 낳았습니다.
강아지들이 자라서 나눠 줘도 될 시기가 되자
신문에 다음과 같은 광고를 냈습니다.
“좋은 가정에 공짜로 분양해드립니다. 열 두 마리의 사랑스러운 강아지들입니다.”
몇 주가 지났지만 분양된 강아지는 3마리 밖에 안됐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한 뒤, 두 번째로 다음과 같은 광고를 내었습니다.
“여덟 마리의 예쁜 강아지와 절망적으로 못생긴 강아지 한 마리가
절실하게 좋은 가정을 찾고 있습니다.”
바로 이틀 내로, 그들은 절망적으로 못생긴 강아지를 아홉 번 분양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이 세상에 보살피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기적인 사람보다 더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비심은 가볍게 보살펴 주는
정도일 수도 있고,
영혼을 흔들어서 눈물겹도록 울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자비심에서 흘리는 눈물을 “사랑의 눈물”이라 부릅니다.
전설에 따르면, 경외 받는
중국의 여성 보살인 관음보살,
구완 인은,
삶의 그물에 걸려있는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의 고통을 보고
사랑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것은 궁극의 자비심입니다.
낯선 이들의 고통과 잡아 먹히는 모든 동물들의 고통에,
그리고 삶의 그물에 걸려있는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의 고통에 의식이 눈을 뜹니다.
대부분의 사회가
진화하는 패턴은
사람의 의식이
진화되어 가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위저드 코스에서 배우게 됩니다.
사회는 채집과 수렵의 씨족집단에서,
농사를 짓는 부족집단으로 진화하고,
이 농업 집단들의 공동 경험이
정치적인 국가들로 결합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일이 잘못 될 수가 있습니다.
정치적 상태의 경쟁이 산업주의로 이어지고,
산업주의는 결국 부,
즉 돈의 강박적인 추구를
낳게 만드는 무역 경제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심이 점검되지 않으면,
사회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제 만약 이기심이 사회를 무너뜨리기 전에
사람들이 자신의 책임감,
자비심,
그리고 타인을 위한 봉사를
회복할 수 있으면,
그들은 친구들로 이루어진
협동하는 공동체로 진화해나갈 것입니다.
물질적 부를 얻는 것에서
영성 수행하는 쪽으로 가치가 옮겨갈 것입니다.
상가(도반)가 생깁니다.
그곳이 바로 이 교실 안, 우리가 있는 곳입니다.
관조하는 시대에서
지도력과 숙련된 영성 수행 법을 통해
밝은 지구 문명의 기초를
창조할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충분한 수의 사람들을 변화시키면, 여러분은 사회를 변화시키게 됩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으려는 동기를 보리심 이라고 하며,
이는 자비심과 지혜가 결합된 것입니다.
보리심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깨달음을 이루려고 하는
열망이 아니라,
그 길을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들이 고통의 원인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멋지지 않겠습니까?
‘나의 완벽한 스승의 말씀’이란 책에서,
파르툴 린포체는 보리심의 3가지 차원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장 낮은 수준은 왕의 길입니다.
왕은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자신의 이익이 결정적으로
왕국과 백성들의 이익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중간 수준의
보리심은 사공의 행로입니다.
그는 강 너머로 손님들을 건너게 해주면서,
동시에 자기자신도 건너갑니다.
가장 높은 수준의 보리심은
양치기 즉 보살입니다.
그는 모든 양들이 반드시 자신보다 먼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합니다.
몇 년 전에 트레이너들이 저에게
동으로 된 지장보살 상을 주었습니다.
지장보살은 끈기의 보살이라고 불립니다.
왜냐하면, 지장보살의 맹세는
마지막 인간이 깨어나서
천국에 들어 갈 때까지
지옥에서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보리심입니다.
아봐타의 보리심은
우리가 밝은 지구 문명에
기여하려고 하는 결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충분한 수의 사람들을 격려하여
이런 진화의 계단을 오르게 하면,
그 즉시 사회의 가치가 바뀝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한 가장 좋은 방법은,
계속 이 길에서 끝까지 더 많은 아봐타, 마스터, 그리고 위저드를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점심을 함께 하곤 했던 노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좋아했습니다.
“한 방울에서부터 시작하라”
글쎄, 휴스턴 -우리의 물방울들은 갖춰졌습니다.
우리가 뜻대로 살고,
자비심을 보이고,
지속적으로 다른 이들을 도우며 수행을 하면,
우리는 물방울들을 맹렬한 강물로 바꿔놓을 것입니다.
밝은 지구 문명을 만든 것이
여러분의 유산이 되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이 다른 존재들에게 득이 되고, 행복을 가져다 주기를 바랍니다.
아봐타에 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아봐타 마스터에게 연락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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