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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기타리스트 임현기입니다. 반갑습니다.
분위기가 굉장히 민망하고 좋네요.
악기 안 메고 무대 서보기는 처음이라 심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
오늘 제 음악과 그리고 저도 고항이 대전이거든요.
활동무대는 지금 서울인데 고등학교까지 대전에서 나왔고
지금 20대 초반에 올라가서 지금까지 12년 동안 활동한 내역들,
그리고 그동안 제가 느껴왔던 점들을 여러분께 같이 공감 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저는 2007년에 음반을 발표했고, 그리고 2008년에 제가 재즈밴드,
, 퓨전 재즈밴드 스팟라이트라는 밴드를 하고 있거든요.
그 밴드에서 또 앨범이 나왔고. 2009년 12월에 2집을 발표했고,
올해 또 3월에 3집을 발표 할 예정인데 조금 딜레이되서 가을에 나올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역으로,
보통 연주자들이 어떤 직업을 갖고 계시는지 혹시 아시나요
가수 뒤에서 보통은 백업맨을 하거든요.
뒤에서 이제 가수가 노래를 할 수 있게 끔
연주를 해주는 직업을 '세션맨'이라고 하고 있는데,
지금 현재 그런 직업을 갖고 있는 전문 연주자입니다.
제가 음악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제가 어머니랑 둘만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머니가 저 중학교 1학년때, 14살때죠.
집에서 너무 외롭게 지내니까 동네에 있는 형들이랑 같이
독서실을 다니게 해주셨어요.
거기서 기타 치는 어떤 형을 봤어요.
그런데 그 형을 보니까 흡사
동물의 왕국에 수컷이 암컷에게 짝짓기 구애를 하듯이,
기타를 치면서 여자친구에게 작업을 하는걸 보면서
'아 저거다. 저게 내 길이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그래서 그때부터 기타를 잡기 시작했는데
엄마를 설득을 해서 유학 아닌 유학을 갔죠. 서울로.
레슨을 주말마다 받으러 다니고 그러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딱히 할 게 없더라고요.
기타쳐서 뭐 특별히 할 것도 없고,
밴드도 그렇게 많은것도 아니고,
기타를 업으로 생각하고 꿈으로 생각하고
연주를 하고 연습을 했었는데,
현실을 알게된 거죠. 22살 나이에.
아 이거는 안되겠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저의 꿈에 대한 노력이
부족했다고 질타를 제 자신에게 하는데
그때 당시에는 그냥 핑계거리 였었던 것 뿐이죠.
제가 그냥 세상이 이렇고
지방출신에 연주를 잘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그래서 원대한 꿈을 꿉니다.
전국에서 제일 큰 포장마차를 운영하겠다고
꿈을 꾸고 들어간 데가 청담동에
'하자 포장마차'라는 곳입니다.
거기가 연매출이 거의 중소기업 수준을 웃도는
연예인들이 많이오는 포장마차로 유명한데.
거기서 1년정도 일 하다가
대전에서 고등학교때 알게 된 지인형님이 잡으러 오셨어요. 저를
왜 기술 썩히고 사냐고.
새벽 4시에 짐을 싸들고 대전에 내려왔죠.
대전을 내려온 때가 2002년도였을 거에요.
2002년도에 왔는데 처음 오셔서 연주를 시키시더라고요.
그래서 연주를 했죠.
그런데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셨어요.
'그런데 딴거는', 물어보시더라고요.
'딴거 뭐요라고 했더니 폴카를 한번 쳐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폴카는 여러분 기타를 한번씩
쳐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가장 쉬운 리듬이에요.
그리고 '이정선 기타교실' 14페이지에 나오는
아주 그냥 기초적인 리듬 패턴인데
그걸 못치더라고요. 제가.
그거를 그 형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 이것도 못하냐'가 아니라
'이런것도 해야돼'라고 설득을 해 주시는 거에요.
그런데 저는 그걸 이해를 못했어요.
왜냐면 아집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연주에 대해서는.
내가 이거를 안해봤으니까 못하는거지,
못해서 못하는건 아니야 라고 생각을 하고 연습을 했죠.
당연히 실력이 안늘죠.
벌써 머릿속부터 조종을 하기 시작하는데
손가락들이 안움직이죠.
음악을 음악으로 듣지를 않으니까요.
단순한 그냥 기계로만 느껴지니까.
테크니션인거죠. 그냥.
그러다가 제가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고쳐먹게 된 계기가 그 형님이
언제 원하는 날 소주를 먹는데
'너는 왜 그렇게 포장마차를 하려고 했냐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저 홀어머니 모시고 아버지도 안계신데
어머니 되게 행복하게 해드려야하지 않겠냐.
기타를 안 느는 거같아서 그냥 접고,
다시 서울가서 포장마차 일 배워가지고
지방에서 크게 한번 해보겠다.
' 그랬더니 형님이 딱 한마디 하시더라고요.
'그래. 너희 어머니가 자기 자신 때문에 자식이 하고 싶은 거
못 하고 산다면 참 좋아하시겠다.'
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굉장히 많이 깨달음을 얻었어요.
득도한 것처럼.
소주먹고 득도한건 처음인데.
그 깨달음을 얻고, 생각을 좀 더 고쳐먹었죠.
좀 더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한 1년정도 연습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한 하루 18시간씩 거의 방에서 안나왔어요.
거기서 살다보니깐 기회가 오더라고요.
기회는 누구에게나 온다고 하는데
저는 정정하고 싶습니다.
노력하는 자에겐 기회가 옵니다.
그래서 첫번째 기회가 bmk라는 가수 bmk라는 가수 혹시 아세요?
그 가수가 그때 '천년동안도'라는 유명한 재즈클럽 노래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 기타 자리가 빈다고 해서
오디션을 봐서 합격을 한 거에요.
8개월정도 같이 활동을 하고 방송 활동도
그때 데뷔를 해서 2003년도에 데뷔를 해서 활동을 했는데
리더가 갑자기 저를 자릅니다.나가라고.
한번은 교훈이 있으니까 저는 당당히 나왔거든요.
'10년 후에 제가 더 열심히 해서 떳떳한 모습으로 오겠습니다.'
라는 얘기를 했을때 저는 제 자신이
굉장히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후속 연주자가 연주를 하는걸
공연을 가서 보게 됐는데 굉장히 실망을 했어요.
쟤보단 내가 나은거 같은데,
주위에서도 그러는데.
또 소주를 먹었습니다.
형님이 한 마디 하시더라고요.
저는 굉장히 상대적으로 봤던거죠. 그 친구를.
그런데 그 형님은 그때 당시 제일 잘 나가는 연주자 이름을 거론하면서
'네가 그 사람만큼 연주했으면 왜 짤렸냐.'
그때 굉장히 2번째 패닉상태에 빠졌어요.
그 형님 말씀이 맞거든요.
저는 상대적으로 저 친구만 이기면 된다고 생각했지,
제가 잘해야 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던 거에요 저는.
그래서 두번째 소주 득도를 하고,
또 연습을 합니다. 1년정도
하다가 두번째 또 기회가 왔습니다.
날짜도 안 잊어먹습니다. 2004년 3월 16일.
2004년 3월 16일날 전화가 왔는데
그 포장마차에 굉장히 많은 연예인들과 연예계 종사자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저를 이쁘게 봐주셨던 분들이 굉장히 많으셨어요.
제가 그때 월급 140만원씩 받고
팁을 한 300만원씩 받았거든요.
다~.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합니다. 여러분.
농담이고요.
아무튼 전화가 왔는데
그분이 저 그때 사는 모습을 보시고
'너는 뭐가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저는 기타리스트가 되는게 꿈인데,
현실적으로 안돼서 이걸 하고 있습니다.
라는 대답을 했거든요.
그분이 웃으면서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술도 좀 취했겠지만.
내가 지금 t윤미래라는 가수 매니저를 하고 있는데,
나는 지금 제작자가 아니니,
내가 어느 날 제작자가 되면 너를 컨택을 하겠다.
그런데 정말 전화가 온거에요. 2년 만에.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아가지고.
그래서 '그 제작하는 사람이 누구냐라고 했더니,
바비킴이래요. 그래서 밥을 익혀? (웃음)
바비킴이라는 가수라는 거에요.
뭐 그래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고 만났어요.
그게 2004년 6월 이었는데 6월 달에 만나서,
그 김형을 만나서 이제 저에게 이제 주어졌으니까
제가 밴드를 조직해서 세션팀을 조직해서 해야되는데
저는 4년 동안 한 거라고는 박스날르고
'얼맙니다.'
뭐 병닦고, 이런 거밖에 안했으니까.
연습은 열심히 해서 자신은 있었지만 기반이 없잖아요.
지금와서 생각을 해보니까
제가 그 때 당시에 변명만 늘어놨으면
지금 이 자리에 서서 여러분께 할 수 있는 말이 없을 거 같더라고요.
제가 얼마를 벌던 뭐를 하던 잘 나가던 못 나가던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기회 조차 없었더라고요.
지금도 단점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변명하지 말고 인정하는 순간에 자신은 업그레이드 되는 거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느껴왔고, 살아왔고요.
또 한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얼마전에 또 술 얘기를 하네요.(웃음)
얼마전에 아는 형님이랑 맥주를 먹고 있는데
일하시는 분이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 형님이 그 일하시는 분한테
넌 그 일하시는분이 그 바 있잖아요 바에서
맥주를 먹고 있었는데
전공이 뭐냐고 물어봤을때 '의상디자인인데요.'
그래서 '꿈이 뭔데'라고 했더니
'아휴 그런건 없고요. 그냥 좋은 직장 들어가서
제일모직 이런데 들어가서 좀 벌면 좋을 거 같아요.'
라고 얘기할 때 저는 그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해 보였어요.
정말 불쌍해 보였어요. 정말.
사람이 꿈꾸지 않으면 사는 의미가 없는 거 같아요.
잘때 꾸는 꿈 말고요.
여러분. 꿈은 24시간 꿔야 되는거 같습니다.
저는 10대 때 꿈이 멋있는 기타리스트가 되는게 꿈이었거든요.
이제 기타리스트는 됐는데
아직 살을 못 빼서 멋있는까지는 못 갔고요.
20대 때는 활동하면서 영화 음악 감독으로
데뷔하는게 꿈이었는데
26살때에 데뷔를 했습니다.
OCN에 '그녀만의 테크닉'이라고.
네. 지금 보신거는 사실 그 말씀드린 영화는 아니고요.
이건 최성우 감독님의 'Give or Take'라는 영화인데
칸 영화제 독립 영화 부문에서 수상을 한
나름대로 되게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꿈을 나름대로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며칠전에 꿈이 하나 또 생겼어요.
'게리 무어'라는 기타리스트 혹시 아세요?
그분이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북아일랜드 출신이시거든요.
그런데 아시아에 한 나라에서 뉴스에 나올 정도의
명성을 갖고 계실 줄 몰랐어요. 저는.
저도 굉장히 존경하고 연주를 좋아하는 기타리스트인데
그걸 보면서 '아 나도 내가 죽어서 MBC 뉴스 데스크에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되게 웃긴 얘기지만
하나의 목표가 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또 제가 나이가 적습니다.
32살인데 30대에 또 꿈이 하나 생겼어요.
아까 말씀드린 것은 소소한 목표였을 뿐이고,
30대의 꿈은
이제 공연 연출하는 연출가가 되는 꿈이 또 하나 생겼거든요.
제가 연주 활동 하면서 연출도 같이 하는
우리나라 국내 아마 최초
제가 성공을 한다면 1호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저는 성공 할 자신이 있다고 단언하고요.
노력만 하고 한다면
기회는 언제든 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작년 11월달에 혹시 부활 콘서트 있었던 거 아세요?
1월달에 보컬리스트 콘서트 있었던거 아세요, 혹시?
그 두개 제가 기획 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 꿈을 향해 한발한발 나가고 있는데
돈은 많이 못벌고 있어서 와이프가 좀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드리고 싶은 말씀은
좀 극단적이지만
저 같은 사람도, 저 같은 놈도,
저 같이 환경이 좋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환경 탓 할 거 없고, 남 탓 할 거 없고,
자기 자신이 열심히 할 자신만 있고, 있다면
기회는 언제든 오고,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을만큼
여러분의 노력이 기반이 된다면
여러분의 꿈은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얼마전에 제가 '울지마 톤즈'라는 영화를 봤거든요.
개인적으로 이태석 신부님을 개인적으로는 모르고
저희 어머님 통해서 알게 된 분인데
거기 명언이 나오더라고요.
꿈을 꾸는 사람들은 많지만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또 하나 제가 또 너무 감명 깊었던게
그 분이 되게 부산의 달동네에서
10남매중 9번째로 태어나서 자라셨어요.
그렇게 허름한 동네에서 자라신 분이
대한민국을 정말 아프리카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성지다.
천사들만 사는 나라다.
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분이었고요.
저도 외람되지만 자양동에 산 동네 출신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수단까지는 못 가겠습니다.
아직 처자식이 있어서.
대한민국에서 저는 열심히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열심히 해서
이 나라의 힘찬 역군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웃음)
마지막으로 제 연주곡 중에 '어머니'라는 곡이 있어요.
세상에 어머니 없으신 분은 없잖아요.
저에겐 또 특별한 의미가 있는 분이거든요.
조금 이따가 멘트는 나올텐데
조금만 더 자세한 설명을 드리면,
저희 어머니는 24살때,
23살때 결혼하셔서 24살때 저를 가지셨는데
저희 아버지가 24살때 돌아가셨어요.
엄마 뱃속에 4개월인가 5개월쯤에
돌아가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외갓집에서는 난리가 났죠.
애기 지우라고. 새 출발 하라고.
그런데 엄마는 그 상태에서
저를 낳아서 키워주셨거든요.
정말 속 많이 썩이고 정말 나쁜 짓 많이 하고
정말 그렇게 했는데,
제가 그 20살 때 할 일이 없어서
이제 우리 임대표님이 계신 성심당 옆에
편의점에서 일 했다고 했잖아요.
그때 밤에는 편의점에서 일하고, 낮에는 술먹고,
밤에는 편의점에서 일하고, 술먹고,
맨날 방황하고 살았던 거에요.
그런데 제 생일이 1월 6일인데
1월 6일날 어머니가 10만원 짜리
그러니까 만원짜리 10장이랑
편지 하나를 봉투에 넣고 나가시더라고요.
처음으로 태어나서, 처음 받은 엄마의 편지였거든요.
그 글귀가 딱 2줄이 이렇게
그것도 맞춤법 틀려가면서 써 놓은게 있었는데.
'세상 모든 사람이 우리 아들한테 돌을 던지면
내가 막아 줄 수 있지만,
우리 아들이 나에게 돌을 던지면 너무 아프다.'
라는게 써 있었어요.
그 다음부터 저의 터닝 포인트가 됐던 거 같아요.
마지막 곡 연주로 대처 해 드리고요.
제가 사실은 오늘 연주를 들려주고 싶었는데,
이제 기반 사항들이 좀 안돼있으면
제가 여러분한테 연주를 들려 줄 수 있는게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건 도리가 아닌거 같아서
죄송하지만 영상으로 오늘 대처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좋은 기회가 돼서,
만약에 여러분이 저의 연주를 들으실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열과 성의를 다해 목숨을 다해
연주를 하는 연주자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