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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지금까지 좋은 하루입니다, 그렇죠?
그럼 제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청중분들이 잊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 있는데요
바로 멘토링의 중요성 입니다.
저는 젊고, 여성입니다.
저는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저는 오하이오의 데이튼 출신이고, 영화를 만듭니다.
오늘 말씀드릴 이야기는 제가 어떻게
오하이오에서 여권 신장 영화작가가 되었는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제가 보기에 많은 젊고 재능있는 사람들이
더 푸른 들판을위해 오하이오를 떠난 것 같아요.
오하이오에 머무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물가가 좀 싸졌죠. 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건 가능해요.
아무튼, 이건 "널 끌어당겨라
네 부츠끈을 당겨서"류의 이야기가 절대 아닙니다.
저는 제가 가진 특권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가난하게 자랐지만, 적응했죠.
저는 백인이고, 상위 중산층 정도로 보입니다.
저는 건강하고, 그래서 밑바닥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저는 언제나 재능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적어도 훌륭한 예술학생이었죠.
그리고 예술선생님들은 저를 언제나 구원해 주셨죠.
던 선생님께서 특히 그랬습니다.
선생님은 언젠가 제게 집에갈 차비를 하라며
5달러를 주신 적이 있었어요.
또한,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저 자신도 몰랐던
저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저는 제가 감독이 되고자 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라이트 주립대에 입학하기 전까지는요.
저는 찰스 데리 박사님과 수업을 함께 듣고있었어요.
그는 이쪽 세계에서는 매우 존경받는 분이시죠.
찰스 박사님은 제가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들을 공개적으로 하셨습니다.
그는 금기에 대해 이야기 하셨어요. 섹스나 죽음 같은.
그리고 게이로 존재하는 것, 혹은 정치나 전쟁같은 이야기들도요.
선생님께서는 제게 이런 것들을 주제로 하는
영화들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영화가 굉장히 강력한
매체일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죠.
그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지만,
저는 아직 많은 것들을 배워야 했죠.
예를 들면 제 첫 번째 카메라인 K-3는
엄청 크고 무거워서
전혀 사용자 친화적이지 않았죠. 전 겁이 났어요.
그래서 제 남자 교수님께 말씀을 드렸어요,
제가 그에게 말했죠, 농담이었지만, 말했죠,
"교수님 저 못하겠어요, 전 여자잖아요."
그러자 교수님도 농담조로 말씀하셨죠.
"우리 딸도 너랑 같은 나이거든,
근데 걔가 너랑같이 있다면
아마 널 한 방 먹였을거야."
(웃음)
제겐 그 때가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으로 누군가 제가
성차별주의자라는 것을 지적해준 순간이었거든요.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라이트 주립대학교는 경쟁이 심한 학교입니다.
매년 학생수가 줄어들어요.
2학년 때 저희 반 여자애들은 모두 자퇴를 했었어요,
저만 빼고.
그래서 4년간 제가 유일한 여자였죠.
저는 그 상황에 개의치 말아야 했어요. 사실 개의치 말아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무엇이던지 정말 잘해야 했죠.
저는 머리를 모두 잘라버렸어요. 그건 자유의 상징이었죠,
하지만 그건 분명히 생존을 위한 것이었어요.
2008년이 되자 저는 소위 정치적 성향이 강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당시 사라 페일린과 힐러리 클린턴의 이분법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미디어가 그들을 어떻게 묘사하는지가 저의 관심사 였습니다.
예를 들면, 사라 페일린은 언제나
예쁘지만 좀 모자란 듯한 캐릭터였고,
힐러리 클린터는 반면에 언제나
빈틈 없지만 좀 못생긴 캐릭터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말한 것과 행동한 것은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이 저를 정말 짜증나게 했고요.
저는 "공원" 이라는 단편 영화를 찍었습니다.
여성 성장 영화였는데요,
트레일러에서 자란 여성이 주인공이었죠.
"공원"은 당시 굉장히 큰 프로젝트였어요.
굉장히 많은 재능이 필요했죠.
그 영화제작에 작업했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 프로로써 영화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 영화는 3년이 걸렸습니다.
제가 학생일때 만들었죠.
영화는 주로 젊은 여성이
어떻게 성 노동자가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공원"은 성공적이었어요. 대략 9개의 영화제에 출품되었고,
그중에 하나는 슬램댄스 영화제였죠.
혹시 영화제에 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한 말씀 드리자면
슬램댄스 영화제는 메이저 영화제에요.
유타주 파크시티에서 열리는데요,
길 건너면 선댄스 영화제가 열리지요.
슬램댄스는 선댄스에 대한 응답같은겁니다
아무튼 인디필름 영화제 중에서 가장 인디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웃음)
아무튼 저의 멘토이자 위대한 다큐 감독인
줄리아 라이커트는 제가 난관을 극복했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녀가 옳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마 난관을 극복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줄리아 라이커트와
스티븐 보그너같은 분들이 계시지 않았더라면요.
그들은 정말 제게 제 기술을 연마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죠.
영화 감독으로서요.
그들과 함께했던 제 견습기간은
제게 거장들이 그들의 작품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보여줬습니다.
그 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죠.
그분들께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먼 지역의 병원"이라는 영화를
찍을 때로 기억하는데요,
보험이 없는 사람들이
나스카 레이싱 경기장 밖에서 하루밤을 노숙하며
그 다음날에 무료 보험을 얻으려고 하는 다큐 영화입니다.
저는 한 여성을 인터뷰하고 있는 스티브와 함께 있었죠.
그녀는 하루종일 줄을 서 있었죠.
그녀는 안경을 받으려고 줄을 섰었죠.
그녀는 볼 수 없었고, 그래서 일을 하려면 안경이 필요했습니다.
그녀는 인터뷰 중에 울음을 터뜨렸어요.
우리는 몇가지 이유로 인터뷰를 그녀의 위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앉아있었고 우리는 위에서 아래로 그녀를 찍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울기 시작할 때,
스티브가, 즉시 한 쪽 무릎을 꿇었고,
우리는 그녀의 눈을 볼 수 있었죠.
그는 그렇게 인터뷰를 바닥에 앉아서 마쳤습니다.
그런 감정 충만한 순간을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은
완전한 특권이죠, 존경을 받을만한 행동이었어요.
그리고 스티브는 저에게 어떻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이야기꾼이 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었죠.
다큐 감독으로써, 우리는 항상 그 대사를 바라봅니다.
그 대사는, "나는 지금 이 현실을 묘사하고 있는가?"
그것이 가장 객관적인 것일 방법으로?"이죠.
그리고 "나는 내 피사체를 왜곡하고 싶지 않다" 라는 대사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왜곡하는 것은 정말 쉽습니다.
감독으로써요.
카메라가 있죠, 마이크도 있고요.
다른 사람에 대한 어떠한 힘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순간이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는지 혹은
카메라를 치워줘야 하는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그런 특권을 가졌을 때,
당신은 그 힘을 반드시 활용해야 합니다.
당신이 어떤 것이 흥미롭다고 생각하거나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죠.
바로 그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도구로써 미디어의 힘은 부정할 수 없죠.
그래서, 저는 2012년 데이튼을 떠나 신시내티로 갔어요.
제 학교 친구 에릭 스톨과 함께요.
그리고 체이스 화이트사이드와 New Left Media와 함께요.
2012년 저희는 인터넷을 위한
대선경선에 관한 영상을 만들었어요.
또한, 저는 제 기여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는데,
"여성의 건강에 관한 싸움"이라는
우리가 만든 영화작품이죠.
영화는 바이러스처럼 퍼져서 100,000명이나 시청되었죠.
대성공 이었죠.
대선 당시를 기억해 보시면,
여성의 생식적인 건강은 굉장히 뜨거운 이슈였죠.
"여성들로 꽉 찬 바인더"라는 것같은 걸 기억한다면, (대선 경선 당시 공화당의 미트 롬니 후보의 실언)
여러분 일부는 기억하시리라 확신합니다만,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저는 정치적인 사람입니다.
저는 제가 여성옹호가이고, 그렇게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죠.
그래서 제가 지금 여기 서 있는 거겠죠.
저는 '여성 노동자 연대'의 공동 발기인 입니다.
저희는 세 명의 여성이고,
현재 저희는 단편영화를 제작 중입니다.
제목은 "대안적인 카센터"인데요.
영화는 여성들로만 구성된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의 한 카센터 이야기 입니다.
카센터는 여성들로만 운영되고요.
이것은 세계에서 유일한
여성들로만 운영되는 카센터 입니다.
이 사람들은 정말 굉장합니다.
저희는 막 촬영을 끝냈는데요.
즐겁게 편집하고 있습니다.
짧게 말해, 제가 데이튼에 있을 때
운좋게도 최고의 은사님들을 만났죠.
라이트 주립대의 교수님들,
저의 길을 걷도록 도와주신 많은 분들,
WISO의 모든 여성들 역시 제가 감독이 되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제가 더 많은 영화들을 만들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언젠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저의 은사님들이 저를 감동시켰던 것 처럼요.
끝으로, 관객분들께서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누군가
여러분이 멘토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혹은 무언가를 배우거나 해보기를,
우리의 공동체에서 그 사람들을 찾는것에 대해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그들은 항상 있거든요.
우리는 지금 테드엑스를 하고 있죠, 당신은 그들이 거기 있다는 걸 아시죠.
여러분들은 정말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살 수 있습니다.
여기 데이튼에서 다른 이들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을겁니다.
감사합니다.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