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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 첫 순간을 기억합니다.
제가 난독증을 앓고 있다고 들은 그 첫 순간을 기억합니다.
1학년 혹은 2학년 쯤에
선생님께서 저를 작은 교실로 잠시 불러내셨을 때가 생각납니다.
선생님은 저를 앉히고 5개의 자석 글자를 칠판에 붙이셨죠.
"파이퍼, 이 5개의 글자를 읽고 무슨 뜻인지 한번 말해줄래?" 라고 말씀하셨죠.
저는 칠판을 한참 바라본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뭐라고 쓰였는지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께서는 "괜찮아. 그런데 저건 네 이름이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분이 바로 오늘 아침에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해요.
제 얼굴은 정말 홍당무처럼 빨개졌죠.
그 순간에는 제가 제 이름조차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정말 창피한 정도가 아니었어요.
그 이듬해에 어머니께서 제가 개인 교습을 위해 다니던 집으로
저를 데리러 오셨을 때
교사가 밖으로 나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님, 파이퍼와 함께 순서 세는 공부를 도와주세요."
"아직도 어떻게 1달러가 되는지 이해를 못해요."
"여기 4개의 쿼터(25센트 동전)가 있으니 아이와 함께 달러 노래를 계속 불러주세요."
그래서 우린 집에 오자마자 책상 앞에 앉아서
달러 노래를 4~5번 함께 불렀습니다.
"25(센트), 50(센트), 75(센트), 1달러~"
그리고 제가 따라부를 차례가 되었죠.
"25, 50......?"
"파이퍼, 25, 50, 75, 1달러. 다시 한번 해보렴"
"25, 50 ......"
"파이퍼, 그냥 4개일 뿐야."
"25, 50, 75, 1달러."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난독증이 제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기억이 납니다.
저는 교과 과정의 일부 단계들을
완전히 익히고 넘어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기억이 납니다.
한가지 길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었어요.
저는 1학년부터 8학년까지 일반 정규 과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4학년때 저는 외국어를 배울 수 없을거라고 들었습니다.
6학년때는 구구단을 반드시 외워야
학업을 계속 진행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주어진 프로그램을 이수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어요.
저는 여러분처럼 배울 수는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했던 것은 보통의 교실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핑크 드레스를 입고, 꽃머리핀을 하고 그 곳에 앉아있을 때
저만 다르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그 교실에서 벗어나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것이 기억납니다.
제 부모님은 제가 케이프 엘리자베스 교육 시스템 밖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다해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제 IQ 테스트 결과가 비정상적이어서 테스트를 계속 받았습니다.
많은 영역에서 최상위 등급을 받았습니다.
저의 두뇌는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8학년이 되었을 때, 저는 마지막으로 IQ 테스트와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의 결론은 "학생에게 계산기와 사전을 줄 것" 이었습니다.
그 후 부모님과 선생님들, 교육 지원 고문,
그리고 행정부처까지와도 여러번 회의를 했습니다.
결국에는 제가 정말 원했던 말을 들었습니다.
"학생이 성적과 스스로를 잘 관리할 수 있다면
이 교육 지원 프로그램을 졸업해도 좋습니다."
비록 졸업을 했지만 이 모든 것이 사라진 건 아니었습니다.
매일매일 저는 제게 난독증이 있다는 사실에 부딪힙니다.
예를 들어, 이번 여름에 메인리 버거라는 푸드 트럭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계산대에서 햄버거를 주문받는 일을 했는데,
제가 양파 철자를 "U-N-I-O-N-S" (노조) 로 썼어요. (양파 철자는 Onions)
그로부터 3주 정도 후부터
애들이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어요.
"파이퍼, 그 사람이 햄버거에 유니온을 넣어달래?"
(웃음)
또는, "파이퍼, 메리가 주문한게 큰 유니온 링인가? 작은 유니온 링인가?"
(웃음)
가끔 제일 친한 친구인 첼시에게 전화해서
단어 한개의 철자만 물어보고 끊기도 해요.
철자 체크 기능은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몰라서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그리고 제 SAT 점수 말이죠. 이게 정말 재밌어요.
제가 5월에 아무 준비 없이 SAT를 한번 봤는데
제가 받은 점수가 1,350점(약1,600점 만점)이었어요.
전 제 엄마, 아빠 그리고 오빠에게 전화했죠.
울면서 1,350점 점수를 이야기 했습니다.
제가 알아본 학교중 단 한 곳도 1350점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두번째 SAT를 위해 매주 세번씩 2시간동안
한달간 1:1로 개인교사와 함께 준비했어요.
그리고 제가 받은 점수는 1,350점이었습니다.
1,350점이 제 운명이었죠.
그리고 최근에 편지를 하나 썼는데요.
대학 교수님께 저를 만나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죠.
단지 4~5문장 정도였습니다.
포스트잇에 써보고 고치고
또 써보고 고치고
그리고 나서 철자가 틀린 것 같은 단어들에 동그라미를 쳤어요.
구글에 검색도 하고요.
그리고 카드에 연필로 편지를 쓰고 그 위에 펜으로 다시 썼어요.
이것이 겨우 4~5 문장을 쓰는데 들어간 과정입니다.
저는 난독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엄청난 시간과 힘을 들이곤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서는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구구단이나 외국어 능력을 완전히 익히는 것
그리고 제가 읽고 있는 책이 왜 이해가 안되는지 알아내는 것이
저에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과
제가 즐기는 일을 더욱 잘하게 하는 만드는 것이죠.
저는 일한다는 것이 너무나 즐거워요.
엄마의 가구 가게에서 일하고, 아이 봐 주는 일도 하고,
그리고 케이프 엘리자베스 앰뷸런스에서 자원 봉사도 했습니다.
행사를 기획하는 일도 좋아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을 졸업 파티를 기획하는 일에도 참여했고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 앉아 계신 이 모임의 기획 또한 함께 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저의 창의적인 두뇌가 제에게 딱 맞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난 여름 저는 메인예술대학에서 250시간의 미술과정을 이수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학년이 되었을 때
저는 수학, 과학, 그리고 외국어를 그만두었습니다.
저는 저의 열정을 찾아냈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오는 가을에 저는 사바나 예술 디자인 대학에 다닐거에요.
악세서리 디자인 전공과 경영학을 부전공할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도전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을 찾고
즐거워하는 것을 찾고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잘 먹고, 그리고 모든 것과 사랑에 빠지세요.
감사합니다.
(박수) (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