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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사망한 백인 플라톤의 명언으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들어보세요. "철학자가 왕이 되고 왕이 철학자가 되지 않으면
세상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철학자인 제가 이 말을 꽤 좋아할거라 생각하시겠죠.
네 그렇습니다. 제가 왕이 될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민주주의 절대 신봉자에요, 절대적이로요.
그렇지만 플라톤은 민주주의의 신봉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 정부가 아주 나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두번째쯤 나쁜 정부 형태로 생각했습니다.
폭군이 다스리는 절대적 압정이 유일하게 더 나쁜 것이라고 봤죠.
하지만 그는 민주주의 국가를 바다에 떠있는 배에 비유했습니다.
수많은 선원들이 있어서 항상 서로 싸우고
각각의 선원들은 남보다 우선시하는 자기들만의 목적이 있는 겁니다:
어떻게든 배의 소유권을 손에 넣는 대신
배의 방향키는 국민인 선원들에게 넘겨 준다는 거죠.
그들이 항해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배를 약탈하고 싶어하기 때문이에요.
그게 플라톤이 생각했던 민주주의에서의 정치인의 모습이에요.
여러분들은... 정치인이라, 누가 정치인을 좋아하겠어? 라고 생각하시겠죠,
플라톤 역시 그 부류의 사람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웃음)
플라톤은 국민을 짐승에 비유했죠,
이성이 아니라 탐욕과 욕망에 의해 움직여지는 짐승이요.
그리고 그는 민주주의에서의 정치적 협상이라는 기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민주주의에서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은
야만적인 짐승과 함께 뒹굴고 그들을 달래려는 것과 같다."
그건 이성이 아니죠.
그것은 이성적인 토론이 아니라 교묘한 조작과 일종의 설득일 뿐입니다.
제가 정말 믿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저는 플라톤이 민주주의에 대해서 완전히 잘못 알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싶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우리의 시조도 그렇게 믿지 않았으니 문제가 있는거죠?
제가 플라톤의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은 자치와
이성적인 자치에 맞는걸까요,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요?"
플라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아니야, 인간의 마음을 보면 대부분은 그렇지 않아.
극히 소수의 엘리트 집단만 그렇고, 따라서 민주주의는 절대로 작동하기 어려운 제도지."
끔찍한 주장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끔찍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민주주의를 옹호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 민주주의를 옹호하려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걸 더 어렵게 할겁니다.
제가 현대적인 인지 과학을 보여드릴거거든요.
우리는 2,500년전의 플라톤에서 현대의 인지 과학까지 갈 겁니다.
현대적 인지 과학이 하는 일 중에 이런 것도 있어요.: 그건 인간의 마음을 깊이 파고들기도 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아주 깊이 파고든다니까요.
알려진 사실 중에 하나는
사람의 마음이 믿음을 갖거나 결정을 하는데 있어
비이성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다는 것이죠.
모든 종류의 비이성적인 것들이요. 한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기부 효과"라는 것이 있는데요, 사실 이건 물건과 믿음 모두에
관련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기부 효과"라는 것은 자신이 뭔가를 소유하고 있거나
믿고 있을 때,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겁니다.
얻을 수 있는 동등한 것들에 비해 더 많은 가치를 두는거죠.
말씀드렸다시피 이것은 물건이나 믿음, 모두에 적용됩니다.
간단한 사고 실험을 해보려고 하는데요, 이 방에 계신 청중의 절반에게
뭔가 좋은 것을 드린다고 해보죠, 명판이든 컵이든 뭐든 좋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지셔도 좋아요."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 절반의 청중들께는
"똑같은 걸 드리지만
적정한 값을 내셔야 됩니다." 라고 하죠.
그리고는 그 값으로 얼마를 내실지 묻겠습니다.
가격을 적어 넣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쪽 분들께
"이 물건을 얼마에 팔고 싶습니까?" 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보통 사려는 사람들이 적은 가격보다
2배 정도의 가격을 적어 넣어요.
왜 그럴까요? 이유는 그 물건을 수중에 갖고 있어서에요.
이건 물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도 적용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몇몇 캐나다 사람들이 발견한 건데 -- 그 분들은 말을 참 재밌게하죠 --
신뢰를 잃은 믿음에 대한 집착이라고 부릅니다.
신뢰를 잃은 믿음으로 부터의 전환이라고 하지 않구요.
여기서 제가 작은 실험을 하나 하겠습니다.
어떤 증거에 기반한 믿음을 한가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위험 감수하는 사람들과 신중한 사람들 가운데 누가 더 좋은 소방관이 될까요?
이쪽에 계신 분들께 다음과 같은 증거를 제시해드립니다.:
위험을 감수하는 성격의 소방관, 존이 있습니다.
그는 불타는 건물에 뛰어들어 엄청난 위험을 맞이하죠.
그 과정에서 죽음에 직면한 한 가정을 구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과
신중한 사람들 가운데 누가 더 좋은 소방관이 됩니까?
그룹 A는 이렇게 결론을 냅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이죠." 이런 얘기를 할겁니다.
"소방관은 용감해야 하니까,
보세요, 이러쿵 저러쿵 - 그러니까 용감해야만 합니다."라고 합니다.
좋습니다. 그룹 B에게는, 좀 다른 이야기를 들려 드리도록 하죠.
"아주 신중한 소방관 존은
소방대가 불타는 건물로 진입하는 것이 너무 위험해서
진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나자 곧 바로 건물이 무너지고
모든 게 불길과 연기에 파묻힙니다.
존이 소방대원들을 건물로 들여보냈으면 그들은 모두 죽었을 거에요.
그룹 B는 "신중한 사람들이
더 좋은 소방관이 됩니다, 왜냐하면 판단을 잘해야 하거든요."하고 말할테죠.
이게 문제에요. 다 드렸습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께 결론을 듣습니다. 제가 그러죠. "그거 아세요?
전부 제가 만든 상황이에요. 설정된 겁니다.
그저 해보는거에요. 그런데,
여러분이 생각했던 바를 바꾸려고 하셨나요?"하고 묻죠.
이런 믿을 수 없는 증거에 따르면 -- 불가능이죠.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것을 고수합니다.
자신의 믿음이 근거를 두고 있는 증거가
완전히 믿을 수 없게 된다해도 사람들은 그걸 믿으려고 하죠.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시죠? 절대 아니에요.
우리는 잘못된 결정을 내립니다. 사람들은 손실에 특히 민감하거든요.
우리는 물건을 잃는걸 싫어합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믿는 신념도 잃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이게 여러분들이 갖고 계신 믿음입니다. 제가 그런 믿음을 찾아내 볼까요?
어떤 경우에는 믿음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무엇을 믿을건지 결정하는거죠.
무엇을 믿을지 정하려면, 우선 가정을 하고 그걸 시험하죠.
그래서 저도 시험을 해볼까 해요. 가정이 있습니다.
이 가정은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카드의 한 면에 모음이 쓰여있고, 반대 면에는 짝수가 쓰여있습니다.
이렇게 해보세요.
그 카드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 카드들을 뒤집어
가정이 참인지 거짓인지 결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머릿 속으로 문제를 풀어보세요.
아셨죠?
몇분이나 E 라는 카드나 숫자 7이 있는 카드라고 하셨나요?
몇분이시죠?
E 또는 7 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분들은 이 문제를 틀리신 겁니다.
몇 분이나 7번 카드가 아니라고 하셨어요?
몇분이나 7번 카드를 뒤집고 싶으셨나요?
그리 많진 않군요. 왠지 아세요?
여러분들은 아마 모두가 E 카드를 뒤집고 싶으셨을 겁니다.
K 카드나 4번 카드를 뒤집고 싶으셨다면 제가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E 카드를 뒤집기를 원하셨다면 E 카드를 뒤집으셨을 겁니다.
왜냐하면 "짝수가 있다면
가정이 확인되는 거겠지." 라고 생각하셨겠죠.
그런데 여러분이 간과하신 것은 7번 카드를 뒤집었을 때
그 아래 모음이 있으면, 여전히 가정을 확인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가정을 시험할 때, 사람들이 하는 것은 확증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게 그리 대단한거냐고 하시겠죠? 네,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확증 편향이라고 하는거죠.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는 문제에요. 인간의 인지가 틀리는 중요한 경우에 속하죠.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 - 언론도, 정치가들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어요.
시장도 알고 있구요.
폭스 뉴스의 사업 모델은 이런 확증 편향에 기초합니다.
아무도 폭스 뉴스를 보지 않아요. 이미 인지된 인식이
반박되는 것을 보는거니까요.
하지만. 그거 아세요? MSNBC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인터넷이란 보호막을 주었습니다.
보세요, 우리는 - 플라톤이 옳았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엉망이에요.
그래서 어떡할까요? 정부라는 작품을
똑똑한 철학자들에게 넘겨줄까요?
아니면, 엘리트 기술 관료나 과학자들에게요?
그런 멍청이들은 잊어버리세요. 우리가 누굽니까?
우리가 그래야 할까요? 어떤 이들은 그렇다고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저는 플라톤이 반쯤 옳은 답을 제시했다고 봅니다.
부분적으로 맞다는거죠. 그래서 제가 그의 명언을 바꾸려고 해요.
하지만 국가나, 사실 인간에게는 문제가 끊이지 않을 겁니다.
철학자들이 이 세계의 시민이 될 때까지요, 그게 사실입니다,
아니면 지금 우리가 시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나
보통 사람들이 정말로 진정한 철학자가 될 때까지는요.
제가 왜 이렇게 얘기 할까요?
플라톤은 왜 그렇게 왕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철학이 마음을 세우고 그걸 다스리는 학문이기 때문이에요.
즉, a) 철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항상 진리만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b) 철학은 항상 더 나은 논리에 의해서만 바뀌기 때문이죠.
저를 설득하시려면 더 나은 논리를 제시하세요.
더 나은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이 철학이라는 것은
뿌리깊은 진리의 탐구자이고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지요.
심지어는 자신이 이미 인식한 개념에도 의문을 품어요, 대게 확증 편향에 따라서 그러는거죠.
제가 아는 한, 이 철학이라는 것은
민주적 정부 형태에서 공유된 삶이 작동하는데 기본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천부적인 것으로 여기죠,
천부적이란 것은 무든 아이들이 태생부터 민주주의 안에 놓인다는 것입니다.
그게 없었다면, 플라톤이 옳은 거죠.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도 없고, 귀족과 지식 계급만 남아서
그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서 지배하겠지요.
저는 그게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문학과 특히 철학이 지속되도록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