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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제공: SNOW.or.kr (본 자막은 SNOW 자원활동가들에 의해서 제작되었습니다)** 지난 시간 강의를 그만둔 곳에서도
벌써 일이 험악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1789년 10월 초에 여자들의 가두시위가 있었습니다
왕족이 곡물을 축적하고 있는 혐의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녀들은 베르사유 궁전으로 행진했고
그녀들은 베르사유 궁전을 습격 하고 강제로 왕족 그러니까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파리로 이사 오게 했습니다
계속해서 긴장된 상황이 연출됩니다
봉기가 있었습니다
왕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는 분명히 그 상황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왕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귀족들은 나라를 떴습니다 그들은 프랑스 밖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왕과 왕비는 편집증 적이 되어갔습니다
“이런. 알다시피 어쩌면 사람들이 이런 입헌 군주제보다 보다 급진적인 개념을
원할 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우리가 탈출해야 할지도 몰라 ”
그래서 1791년에 제가 이걸 연대표에
적어볼 게요
우리는 이제 1791년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는 건 지난 강의의 복습이에요
6월에 왕족이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왕족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바렌에서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파리로 보내져서 튈르리 궁전에서
가택연금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있는 건물입니다 이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파리에 가보게 된다면 그리고 만약 당신이 루브르를 방문하게 된다면
루브르가 튈르리 정원 건너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가 그 궁전이 이전에 있었던 자리이지요
그래서 결국 왕족은 튈르리 궁전에서 가택연금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6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고 나서 1791년 7월에 다시 한 번 지난 강의를 모두
복습해 봅시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봐! 그들이 탈출 하려고 했다고 그건 왕좌를 내놓고
퇴위해야할 만한 짓이었어
그들은 심지어 우리의 왕과 왕비가 되고 싶어 하지도 않잖아? 그리고 우선 우리도
왕들이나 왕비 따위가 필요 없다고!”
그래서 가장 급진적인 부류였던, 가장 급진적인 좌파의
부류였던 특정한 자코뱅 단원들이, 그들이 탄원서를
마르스 광장에서 받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결국 이런 생각을 하게요
“우리는 왕족들이 더 이상 필요 없어
우린 그냥 공화국이나 필요 하다고
우리는 왕과 왕비가 없는 상태가 필요해”
그런데 그 때 프랑스 국민 의회가 몇 몇 군대를 보내왔습니다
일이 험악해졌습니다
돌을 던지고, 총이 발사되고, 50명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마르스 광장 대학살이 벌어졌습니다
마르스 광장 대학살이 벌어지고
일이 정말로 정말로 과열됐습니다
1791년 말에 일어난 일이 정말 상황을 나쁘게
만들었는데도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8월에 필니츠 선언이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의 통치지가
“우린 프랑스에서 왕족에게 벌어지는 일들이 마음이 안 들어!”
라고 말하는 선언이었지요
명백한 이유가 있었는데
글쎄요, 그 중 하나는 레오폴드 2세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였다는 점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더 깊게 들어가면 그들은 사람들이 왕족에 반대하여 봉기하는 그런 개념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은 어쩌면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제국에서, 혹은 그들의
나라에서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한 생각을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이 사람들은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닐지라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것은 이 사람들이 발표한 선언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사람들을 더 편집증적으로 걱정하게 만들었지요
자, 이제 이 모든 것이 일어나는 동안에,
몇 년 전에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네요
그들이 “우리가 헌법을 만들자 ”하고 약속했던 서약을요
그리고 헌법이 드디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1791년에 프랑스 국민 의회는, 아니면 헌법
제정단은 1791년의 헌법을 실제로 만들어냅니다
프랑스를 입헌 군주제로 만드는 헌법을요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와! 아직 왕이 존재해.
그렇지만 이건 명목상의 최고 위치보다 약간 괜찮을 뿐이야
법을 만들 수도 없지
법 제정은 프랑스 국민 의회가 담당할 거야
왕은 야간의 입법 거부권인가 뭔가 하는 걸
가질 뿐이야
그렇지만 그 대부분의 힘은 제거했지”
그래서 입헌 군주제가 되었습니다
입헌 군주제
사실 그건 영국에서도 이미 진행 중이던
사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아주 중요한 성취였습니다
그들은 헌법을 만들겠다는 서약을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는 상황이 험악하게 돌아갔습니다
프랑스에서, 특히 파리에서요.
혁명은 정말로 파리와 베르사유 궁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냐고 있느냐 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상황은 점점 험악해졌고 이제 부차적인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혁명가들은
단지 입헌 군주제를 기다리는 것을 넘어섰습니다
그들은 공화제를 원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르스 광장 대학살을 배우는 동안 봤습니다
사람들은 진짜 공화제를 위해
서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군대가 총을 쏜 것은 그들이 공화제를
더 원하게 만들었습니다
자, 바로 첫 번째 강의에서 배운 것을 기억한다면,
그 일이 모든 혁명을 정말
촉발시켰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내 생각에는 이 모든 혁명을 촉발시킨
주요한 요인은 바로 프랑스가
파산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점점 더 배를 굶었지요
이 일은 모든 정치가들과 혁명가들과
왕족들이 계속 돌아다니며
자신의 자리를 빈틈없이 지키려고 하는
동안에 일어났습니다
아무도 그 모든 시간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는 완전히 거덜 났습니다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사람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만약 당신이 루이 16세를 본다면,
내가 만약 그를 다시 한 번 본다면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언제나
기억하기 쉽습니다
루이 16세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그는 지금 가택연금 중이지요
아니면 혁명가들에 대해서 말해볼까요?
그들 모두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면 좋지?
사람들이 우리를 쫓아 낼 거라고 만약에 우리가
이 배고픔이나 파산 문제를 해결보지 않으면 말이야”
그러니까 당신이 역사를 공부하면서 몇 번이나 깨달았겠지만 그 문제 해결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겨지는 해결책은
바로 전쟁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 대한 루이 16세의 입장을 알아보면 그는
일종의 윈-윈 전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전쟁이 성공한다 치면, 일단 그는 전쟁을
지원했습니다만
이런 일이 일어나죠 여기에 날짜를 적어볼 게요
그러면 언제나 이게 언제 일어났는지에 틀에 넣는 게 쉬워지거든요
그러니까 이 일은 1791년 말쯤 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4월에 선포했지요 이제 1792년이네요
그러고 나서 여기에 이것은 4월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윈-윈 아니면
적어도 루이 16세의 입장에서는 윈-윈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전쟁을 잘 해낸다면 어쩌면 그를 더
유명하게 어쩌면 그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일이 될 지도 모르거든요
그들은 아마 다른 나라의 부를 약탈할 수 있을 테고
그것으로 프랑스 정부 재원을 재건하는 데 사용할 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전쟁이 잘 되지 않아서 프랑스가 진다면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러면 오스트리아와 아마 당신이 전쟁을 벌였던
다른 사람들이 남겠지요
빠르게 답이 나오겠네요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들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전쟁에서 진다면 군주제로
지배되고 있는 이런 세력들이 혁명가들을 근본적으로
전부 없애버리고 루이 16세를 다시 왕으로 앉힐 것입니다
그러니까 루이 16세의 입장에서는 전쟁은 아주 괜찮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혁명가들의 입장에서도
이 두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렇게 말했지요 “이봐! 와!
우리가 만약 다른 나라들을 약탈 할 수 있으면 좋을 거야
우리가 만약 다른 나라의 곡물들을 뺐어온다면
적어도 프랑스를 덜 배고프게 할 수 있지 않겠어?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혁명을 전파할 수도 있겠지
이 모든 다른 왕들을 넘어뜨릴 수 있을 거야
단지 프랑스 혁명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유럽 혁명이 되는 거야!”
그래서 그들은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아주 빨리 그들은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는
남네덜란드(The Austrian Netherlands)를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그곳은 오스트리아가
해체된 나머지였지요
그래서 그들은 여기서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는 남네덜란드를 공격했습니다
거기서 그들이 교착상태에 빠지긴 했지만
그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성공적으로 끝나진 못했습니다
그리고 프러시아는, 기억하고 있겠지만
필니츠 선언에 참가했었는데 오스트리아 편에서
전쟁에 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프러시아가 공격했는데 처음에는 정말로, 정말로,
성공적이었습니다
프랑스 안으로 약간의 전진을 가능하게 해줬거든요
그리고 프러시아 육군을 책임지고 있던 장군, 브라운 슈바이크 공국의
통치자였던 그가 브라운 슈바이크 성명서를 만듭니다
칠판에 써 볼게요
브라운 슈바이크 성명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필니츠 선언과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브라운 슈바이크 성명서가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놈, 브라운 슈바이크의 통치자는 실제로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를 침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언했습니다 그의 성명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난 이 모든 혁명 정부를 타도할 생각이야
그리고 왕을 다시 세울 생각이야 ”
왕을 다시 세운다
이 모든 일은 1792년 4월에 일어났습니다
오스트리아에게 선포한 전쟁은 왕에게 윈-윈 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혁명가들은 혁명을 전파하길 원했고
다른 나라를 약탈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 즉시 프러시아가 끼어 들어서는 프랑스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요 “우리는 왕을 다시 세울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이 혁명가들을 더 편집증 적으로 만들어서
왕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지요
그들은 왕이 프러시아와 뭔가 비밀스러운 거래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그들이 맞서 싸우고 있는
다른 적들 과요 그래서 1792년 8월에, 겨우
몇 달 후입니다만, 4달 아니면 5달 이후입니다.
1792년 8월에
파리 코뮌이 생깁니다
그리고 내가 파리 코뮌(공동체)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진짜 파리 정부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더 혁명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탈취됩니다
주로 자코뱅 단원들에게요
그리고 그들은 왕가가 살고 있었던 튈르리 궁전을
급습했습니다 바로 여기입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이 그림은 혁명가들, 그러니까 주로
자코뱅 단원들이 실제로 튈르리 궁전을 급습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투옥시켰습니다
이런 이유였습니다 “이봐 프러시안은 군대를 가지고 있어 그리고
그들은 이미 왕을 다시 세울 의도가 있음을 선언했지
우리는 왕을 투옥시킬 거야 왜냐하면 왕이 무슨 일을 꾸밀지
아무도 모르거든”
그래서 그들은 투옥시켰습니다. 아, 스펠링이 틀렸네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투옥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프랑스 국민 의회 안에서 교묘한
책략을 사용했습니다
실제로 프랑스 국민 의회의 잔류파의 시기였는데
그 말은 거기에 반대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주로 좌파들
급진주의자들, 자코뱅 단원들이 있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잔류파의 시기인 8월에 의회는 공화제를
선언합니다
루이 16세가 더 이상 왕이 아니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지요
그리고 이 국가는, 아니면 이 나라는
이제 왕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공화국입니다
왕이 없는 정부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파리 근처의
지방을 돌아다니던 이 깡패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냥 사람들을 죽이거나 그러려고 했습니다 단지
의심스럽거나 어떤 형태로든 귀족이나 왕족을
지지하거나 어떤 면에서 왕정주의자인 사람들을 말이지요
그들은 결국 군주제가 돌아오길 바랐습니다
그리고 이 폭동, 이 제멋대로인 처형과
살해는 결국 그들이 140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고 나서야 끝이 났습니다
이 때 1400명이 처형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보시다시피 상황이 점점 더 험악해지고
험악해지고 험악해졌습니다
왕은 투옥됐습니다
그리고 이따 배우게 되겠지만 그는 오래 감옥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 좋게 끝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혁명가들은 이제 프랑스는 공화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줄곧 이 주요한 두 세력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니까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와 말입니다
드디어 그들이 결국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들이라고
말할 때 나는 프랑스의 군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r겁니다
그들은 결국 프러시아의 침략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발미의 교착상태라고 불렀습니다 누가 이겼는지는 불분명하지요
프러시아는 프랑스 안으로 들어가는 걸 그렇게 열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매우 강하게 밀어 붙일 생각이 없었고 더 많은 군대를 보낼 생각 또한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외부의 위협을 제거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런 식으로 따지고 싶다면요
그러니까 프랑스 국민 의회는 나가서 말했습니다 그들을
물리쳤다고, 내 말은 그들은 이미 공화제를 선언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더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1792년 8월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발미에서 교착상태였지요
발미에서 교착상태
이후 프랑스 국민 의회는, 아니면 국민
집회(The National Convetion)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봐 우리는 새 헌법을
만들 거야 ”
그래서 1791년에 만든 헌법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겨우 1년만 지속됐죠
그래서 새 헌법입니다
새 헌법을 만들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자, 사람들이 모두 그런 소리를 하는 동안이었습니다. 이 유혈사태
루이 16세를 감옥에 가둔 이후의 유혈사태나 이 파리에서
벌어진 폭동과 독단적인 살해는 단지
전조였을 뿐입니다 바로 다음해에 올 더
나쁜 일의 전조요
1793년에, 제가 여기에 피(Bloody) 색으로 적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1793년입니다
그러니까 프랑스 국민 의회가,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니면
내가 그들 중 일부라고 써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1793년 1월에 이미 그들이 왕을 물러나게 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요 그들은 왕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나라들과 전쟁을 벌였죠 왕을 다시 세우겠다는 의도를
서술했던 나라들 과요
그래서 그들이 첫 번째로 한 일은 루이 16세를 처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처형하는 그림입니다
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것이 기요탱 의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여기의
단두대는 실제로 발명될 때 그것으로 사람을 죽일 때 보다
인도적인 방법으로 행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가 사람을 죽일 때 그들이 고통을 느끼게
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그들을 죽이기 위한 것에 더 가깝다고
그래서 이 단두대라고 불리는 매우 인도적인 도구를
사용할 거야
그 날을 사람들의 머리를 아주 빨리 베어버리는 데
사용할 거야"
그리고 그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의사에 의해서 발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으로 그것을 시험한 중요한 인물은
루이 16세였습니다 1월에 단두대로 처형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2월에, 그들이 여전히 배를 굶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요.
그들이 여전히 혁명을 전파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기억하시고요 그들이 여전히
다른 나라를 약탈하고 싶어 했다는 것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2월에 프랑스 국민 의회는, 아니면 국민
의회(The National Council)은, 혁명적인 정부는
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에 전쟁을 선언했습니다
네덜란드 공화국
아마 당신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제가
금방 설명 드릴 겁니다
네덜란드 공화국입니다
자, 아마 당신이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네요. “이런. 어떻게 프랑스가, 여기 있는 하나의
나라가 어떻게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가 있었지?
이제 네덜란드랑 영국한테 까지 전쟁을 선언하고 있잖아?”
그리고 사실 한 달 전에 스페인하고 포르투갈에게도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 편에서 전쟁에
뛰어든 나라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이 한 나라가, 프랑스가, 어떻게 이 한
혁명 정부가 그렇게 많은 국가들을 적으로 두고도 공격을
막을 수 있었을 까요?
그 해답은 혁명 정부가 2월에 그들이
군민병(The Levee en Masse)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언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내가 프랑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발음을 틀렸을 것입니다 분명히 틀렸을 거 에요
군민병
근본적으로 우리가 오늘날 징병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첫 번째 버전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프랑스의 모든 신체 건강한 젊은 남자 중에서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이제부터 군인이 된다고요
그래서 그들은 즉시 수 십 만의 군인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이내에, 여기에 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만 그렇지만 백 만이 넘는 군인들을
더 모았던 것 같습니다
다른 국가들이 군대를 모집한 것과
확연히 다른 숫자이지요
그들은 용병에게 급여를 지급했습니다
그것은 프랑스가 혁명 정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통해서 모집한 군대보다
작은 군대였습니다. “이봐, 이 정부는 국민들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부라고
그러니까 이제 너는 왕을 위해서 싸우는 게 아니야
너 자신을 위해서 싸우는 거라고
너는 너 자신을 대리인으로 내세워서 싸우고 있는 중이야
그래서 외국 왕들에게 지배받지 않기 위해서 말이지”
그래서 모두들 전쟁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계속 반복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은 프랑스 도처에
존재하는 불안과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저 밖에는 혁명가들에게 한 방 먹여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왕족주의자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그런 일들을 단속하기 위한 용도로 1792년
4월에 프랑스 국민 의회는 공안 위원회 (The Committee of Public Safety)
를 만들었습니다 굉장히 좋은 위원회 인 것처럼 들리네요
공안 위원회
그리고 그들은 기본적인 정부가 되었습니다 아니면
사실상(De facto)의 정부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군요
그리고 여기에 있는 잘 생긴 신사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Maxmilien Robespierre)가 집권하고 있었습니다
매우 교양 있는 친구처럼 보이는 군요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스
그렇지만 진짜로 공안 위원회가 잘 했던 것은
굉장히 정치적인 것과 굉장히 편집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지배 아래였기 때문에요
그는 어느 누구보다 특히 편집증 적이었거든요 만약 그들이
충분이 급진적이지 않은 어떤 사람에 대한 조짐을 발견하면 아니면
너무 급진적인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냥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나 아니면 나를
물러나게 하는데 도움을 줄지도 모르는 사람이나요 그들은 그냥
사람들을 단두대로 처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로 공포 정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공포 정치(The Reign of Terror)
그러니까 거의 다음 해 까지 명령에 따라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얼추
16,000명의 사람들을 단두대로 처형했습니다
그들은 기요탱 의사의 인도적인 장치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추정치입니다
제대로 추산한 결과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40,000명 정도는 즉결 처형됐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너 유죄야. 내가 너 유죄라는 거 알아.
이봐 .거기 총 갖고 있는 사람. 이 인간 좀 날 위해 쏴 줘.”
이런 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피비린내 나는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상상할 수 있다시피 이 일의 대부분은 파리나
그 근처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이 작은 도시에서, 물론 주요 도시입니다만,
그러나 수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대학살을 당한 것입니다
단지 만약 이 사람이나 아니면 이 사람과 모의한
사람이나 아니면 이 사람과 작당한 사람이
혁명에 완벽한 충성을 하지 않는 조짐을 발견하거나 그렇게
생각되거나 하면요
자, 결국 사람들은 결국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이봐. 너의 모든 편집증이 혁명을 돕기보단
피해를 주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테르미도르의 반동(The Thermidorian Reaction), 마치 무슨
냉장고나 히터 종류로 들립니다만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제 여기는 1794년 7월입니다
이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라고 부르는 것을
어쩌면 이 강의 끝날 때까지 이야기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혁명 정부가 사실
새 달력을 만들어냈거든요
테르미도르의 달이라고 다시 이름을 붙인 게
원래 7월이었고 조금 바꿨습니다
사실 하루가 몇 시간인지를 조금 바꿨어요
하루를 10시간으로, 한 시간에 100분으로,
1분에 100초로 바꿨습니다
한 달은 3주로 나눠지는데 한 주는 10일 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달력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테르미도르는 7월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7월 반동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람들이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에 질렸다는 반동이요
그러니까 1794년에, 1794년 7월에 그도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왔다 갔다 했냐면요
그러니까 여기는 1784년 7월입니다
여기에 있는 이 잘생긴 신사
그 역시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자, 이제 내가 언급하고 싶은 두 가지가 남았네요.
좀 시간을 돌려서 1793년으로 가 볼까요?
각주를 단다는 개념으로요
우리가 1월에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걸 공부했었지요 내 생각에는
이걸 좋은 일로 보거나 나쁜 일로 보는 것은
당신 마음 인 것 같네요
10월에는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처형당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그러니까 1793년에 역시 처형됐습니다
그의 남편이 처형된 지 9달 뒤에요
그러고 나서 일종의 작은 각주를 하나 이 시점에 달아볼까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다시피 프랑스 전역이 불안의 기운이 감돌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1793년에 봉기가 일어났지요
1793년 7월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공포 정치가 막을 내리기 1년 전의 일입니다 진짜
공포 정치가 자행되고 있던 시기이지요
툴롱(Toulon) 항구, 거기에서 혁명 정부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 봉기는 거의 한 출세 지향적인 포병 대위가
진압했습니다
포병 대위는 대포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그리고 그 포병 대위, 그 봉기 진압을 도와서
내 생각에는 혁명 정부의 많은,
신뢰를 얻은 사람, 그의 이름은 바로, 내가 다른
깨끗하고 새로운 곳에다가 적을 필요가 있겠네요 그리고 이건
다음 강의의 예고입니다 그러니까 1793년 7월에 툴롱에서 새
포병 대위는 정말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아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입니다
그리고 다음 강의에서 그가 한 많은 일들을 알아봅시다